민주주의는 운명을 거부하는 힘이다
오바마와 룰라의 정신적 멘토
‘슈퍼 이론가’ 웅거의 더 인간적이고 더 정의로운 사회혁신 비전
브라질 출신의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로베르토 웅거가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98년이다. 잘 알다시피 바로 그해 대한민국과 웅거의 모국 브라질은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웅거는 대한민국과 브라질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에 직면해 방식은 다르지만 똑같은 문제를 앓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2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브라질은?
이 책을 번역한 건국대 법학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성공적으로 IMF 체제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이면에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 웅거의 진단과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어느 누구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명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 이 책은 세계가 처한 곤경을 헤쳐 나갈 원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불평등, 소득 및 고용 양극화, 높은 실업, 대중의 좌절과 열패감 등 모든 결함의 총합으로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극복할 방법이 민주주의에 있으며, 그 대안으로 정치 자체의 민주화, 경제와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의 민주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촛불혁명 이후를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 큰 울림을 던져 준다. 웅거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촛불항쟁을 제도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운명을 거부하고, 이 저항을 제도화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표방하는 사회경제 유형은 ‘급진민주적 시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여기서 ‘급진’은 전통적 의미의 좌파라기보다는 기존의 서구 영미식 고도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유럽의 사민주의 사회경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특한 발전 체제를 이어온 일본과 독일모델, 그리고 인도·라틴아메리카로 대표되는 종속이론까지 가로지르며 극복하고 뛰어넘으려는 야심찬 기획이라는 의미에서 ‘래디컬’하다는 뜻이다.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까지 고려할 때 경제사회사상을 둘러싸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의 지성들이 벌인 전투는, 거칠게 보면 1980년대 말까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싸움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다양한 유형과 모델들’ 사이의 각축이다. 웅거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사회경제체제는 영미식 시장경제, 유럽의 사민주의, 일본모델 독일모델 스웨덴모델 등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회경제 모델과 유형 체제는 전체 조직과 개인의 열망, 이 두 가지가 한데 결합되지 못한 공통된 결함을 안고 있다. 웅거는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 등 21세기 지구상에 새로 도약 중인 ‘이행기 경제’뿐 아니라, 선진 시장경제 그리고 한국·대만 등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경제적 성취를 이룬 개발도상 경제까지 현재 세계 각국의 모든 경제에 필요한 것이 ‘실험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실험주의는 반드시 권위주의나 기득권에서 해방된 ‘민주적’ 실험이어야 한다.
웅거는 전 세계 경제가 경제적 대중영합주의와 표준적 시장경제학의 가르침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전통적인 도그마에서 탈주하려면 기존 관념들이 방치해온 결함들을 손봐야 한다. 그 결함이란 바로 불평등, 소득 및 고용 양극화, 높은 실업 그리고 수많은 대중의 좌절과 열패감이고, 이 모든 결함의 총합이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다. 웅거는 이 진자 운동을 중단시키고 극복할 방법이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개인들이 역량을 키울 여건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결사체들을 만들고 사회적 대안들을 내놓게 해야 한다. 전통적 주류 시장경제론에 억압되어 있는 대안적 경제사회 형태들의 가능성을 다시 구출해야 한다. 실제로 웅거의 책은 지배적인 경제사회 분석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제도들 간의 조정과 연계를 강화하거나 혹은 신축적으로 완화하는, 제도적 실험주의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상상력이 필요한 곳은 브라질 같은 거대 빈곤국이나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다. 오늘날 주요 강대국과 주요 경제체제들도 과거 열강들이 경험한 것처럼 일련의 풀지 못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변혁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현실적 문제가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와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 그러나 인간의 고통과 국가적 퇴행 속에서 비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잘사는 산업민주국가라 하더라도 더 학습 친화적인 산업경제로 이행하고, 결사체적인 삶과 지속적 교육을 통해 산업경제의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생산성 향상 문제, 산업을 재구성하는 생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복지국가의 분배주의적인 약속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 계급·인종·성별의 실타래로 꼬인 노동자의 구획을 뚫고 다시 출현하는 새로운 양태의 견고한 위계적 분할, 사회에서 탈출 중이거나 사회와 불화하는 실업 상태 혹은 불안정 고용노동자라는 실질적 최하층 계급의 증가, 그리고 집단적 문제의 집단적 해결을 위해 마련한 제도에서 사무직과 현장 노동자를 포함한 광범위한 월급쟁이 중산층의 일반적 소외 문제 등 이 모든 문제가 실제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산업민주국가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웅거는 이 문제를 풀 대안으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열망 같은 미시정치와 상호보완되어 작동하는 거시적 정치실험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