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리(楊萬里, 1127∼1206)는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송대를 다시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나눌 때, 양만리는 육유(陸游, 1125∼1210), 범성대(范成大, 1126∼1193), 그리고 우무(尤?, 1127∼1194)와 함께 ‘중흥 사대가(中興四大家)’, 또는 ‘남송 사대가(南宋四大家)’로 일컬어지며 남송(南宋)의 시사(詩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남송(南宋)의 저명한 시 비평가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역대의 시를 논하면서, 송대의 시인으로는 소식과 황정견, 진사도, 왕안석, 소옹(邵雍), 진여의, 그리고 양만리를 들고 그의 시를 ‘양성재체(楊誠齋體)’라고 일컬었다.
양만리의 동시대(同時代) 사람들은 양만리 시의 특색을 논하면서 ‘활법(活法)’이란 표현을 쓰길 좋아했는데, 예컨대 장자(張?)는 양만리의 시를 ‘활법시(活法詩)’라고 평한 바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강서시파의 후학들이 황정견의 원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시법에 매이자 여본중(呂本中)이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이에 ‘활법’을 제창했다. 그는 말하길, “시를 공부함에 마땅히 활법을 알아야 한다. 활법이란 법도를 모두 갖추면서 동시에 법도 밖으로 나갈 줄 알며, 변화를 헤아리기 어렵지만 법도에 위배되지도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양만리의 ‘활법시’, 그의 성재체는 이러한 여본중의 주장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양만리의 ‘활법시’는 단순히 시를 짓는 방법 문제만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양만리는 <이천린에게 화답한 두 수(和李天麟二首)> 제1수에서 “시를 공부함에는 모름지기 ‘투탈’해야 하니, 손 가는 대로 맡겨도 저절로 홀로 높은 경지에 이르네”라고 해서 ‘투탈(透脫)’을 제시했다. 이것은 시인의 흉금(胸襟)과 사유(思惟)가 어떠한 외부 사물에도 매이지 않으며, 일반적이고 고정된 사고(思考)의 틀이나 법도의 구속 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투탈’은 불교의 고승들이 수행과 관련하여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말 중 하나다. 양만리의 ‘투탈’ 중시는 또 그의 학문이나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만리는 젊어서 유안세(劉安世), 장구성(張九成), 왕정규(王庭珪), 호전(胡銓), 그리고 장준(張浚) 등으로부터 이학(理學)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데, 송대의 이학가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주 만물에 대한 조용한 관조(觀照)를 통해 도(道)를 깨닫고자 했다. 양만리는 평소에 여러 사물들을 접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존재, 모습, 움직임, 그리고 변화 등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우주 자연의 이치를 살피고자 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만물의 존재와 관련된 새로운 발견과 느낌 등을 자신의 풍부한 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해서 시로 나타내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하며, 독자들은 이들이 ‘살아 있다[活]’는 인상을 받는다. “양만리는 만사에 활법을 깨달았다”는 주필대(周必大, 1126∼1204)의 평은 바로 양만리의 이러한 ‘투탈’ 사상과 그의 ‘활법시’를 가리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