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의 기억을 남겨둔 건 그래야 이 세상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야. 에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전쟁은 승리하였으나 밀 농사는 폭망이라! 용사와의 싸움에서 진 마왕이 죽기 직전 뿌린 저주로 대기근이 든 리폴카 제국. 나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는 대륙의 식문화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생의 지식을 간직한 채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면서도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먹지 않는데……. 꼬마 영주님의 대륙판 ‘삼시 세끼’ 프로젝트!
“아기씨는 식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저의 힘이 강하지 않아 환영을 오래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생전 본 적 없는 수많은 음식들이 아기씨의 미래에 존재했습니다. 평생 굶지 않고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며 사실 겁니다.”
정신만 전생의 성인이면 뭐하나, 몸은 아기인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웅, 큰일이다!
2. 미리 보기
“그럼 서부지역 개발안건은 이대로 진행하지. 던전을 아예 박살내버린 게 오히려 좋게 작용했군.”
“플레누스 백작영애 덕분입니다. 설마 서부 던전 아래 금광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지 사람들도 전부 기뻐하고 있습니다.”
회의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특히 서부 던전이 있는 지역의 영주는 당장 일어나서 춤이라도 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너진 던전을 조사하던 중 광물학자가 금맥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은밀하게 전문가를 더 파견해 땅을 파본 결과 대규모의 금광이 발견된 것이다!
문제는 과연 금광의 소유자가 누구냐는 거였는데, 법으로 따져본 결과! 통상 던전의 공략자가 그 던전의 소유자가 된 걸로 치므로 결국 금광의 주인은 황제라는 결론이 나왔다.
소심하고 가난한 서부 영주 제모드 남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광은 개발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서 대귀족가문부터 돈을 굴리는 거상들까지. 이권세력의 개입이 장난 아니었다.
만약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것이라고 판정이 났으면 당장 그날 밤 제 목이 뎅겅 날아갈 수도 있을 판인데. 주인이 황제라고 해서 살았다.
광산 개발은 아무리 조심한들 자연파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오는 이익금의 7퍼센트를 영지발전세라는 명목으로 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주는 들어오는 발전세의 반을 무조건 광산 주변 환경을 보호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나머지 금액은 가문의 수입이 된다. 게다가 영지 주요사업이 생기면 사람도 늘고 돈도 돌 테니 결국 그에게는 이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황제는 금광에서 나는 수익을 서부지역 발전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플레누스 가문에서 거대한 신전을 짓고, 금으로 도로, 병원, 학교 같은 기반시설을 만들면! 드디어 황량한 서부에도 꽃피는 나날이 찾아오는 것이다.
던전에 광물학자가 파견된 건 원래 아메티나 플레누스 백작영애가 한 생각이 정말 실현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제모드 남작은 기쁜 마음에 광산 이름을 아메티나 광산이라고 붙여도 되는지 황제에게 물어보았다. 본인만 허락한다면 상관없다고 해 백작가에 연락을 했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다.
‘금전운은 제국 제일이라고 했으니까. 아메티나 영애의 이름을 붙인 광산도 우리 영지에 돈복을 가져다줄 거야. 하하하!’
던전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었는데. 모든 게 다 지나고 나니 좋은 일만 남았다. 서부 지역 영주들은 무척 행복했다. 비록 쌓인 일이 산더미 같을지라도.
“자자, 시간 없습니다. 어서 가시죠.”
재상부의 관리들이 수북한 서류를 품에 안은 채 자기 담당 영주들을 한 명씩 데려갔다. 신전 건설부터 기반시설 확보까지. 이 모든 일을 빠르게 하려면 업무지옥은 피할 수 없었다. 유능한 재상은 아예 전담관리를 지명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도록 체제를 만들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본 적 없는 영주들에게 관련 지식을 박아넣는 것도 관리들이 맡은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회의장이 텅 비자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인가?”
“네. 내일부터 사흘간은 공식일정이 없습니다.”
“드디어 휴식이군. 가지.”
두 사람은 빠른 발걸음으로 황궁 깊숙한 곳에 마련된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이미 가져갈 물건들은 전부 다 가방에 꾸려놓았다. 텔레포트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시종장은 황궁에 남아 황제의 부재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을 할 예정이었다. 화려한 예복을 벗은 후 가운을 걸치고 피스는 황궁 보물창고에서 꺼내온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내 마나로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정도였던가.”
“한 모습으로 고정하면 그렇고, 바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유지시간이 줄어듭니다. 마나가 고갈되지 않도록 조심해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포션은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마나석도 있으니까 갑자기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데이트도 하기 전에 쓰러지면 안 되지. 꼴사납잖아.”
“확실히 그렇죠. 그런데 백작영애에게 연락을 안 하고 가셔도 괜찮은 겁니까?”
“몰래 가서 놀래주려고.”
“흐흠, 화내시지 않을까요. 게다가 플레누스는 큰 영지입니다. 백작영애가 밖에 계시면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피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에 있어도 알 수 있으니까 괜찮아. 가기 전에 변신하는 게 낫겠지.”
예의 바르게 시종장이 뒤로 돌자 피스는 눈을 감고 강하게 변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황궁 보물 중 하나인 폴리모프 반지는 옛날 드래곤이 황가에 선물로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아티팩트였다.
인간의 마나는 드래곤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드래곤처럼 자유자재로 폴리모프 마법을 쓰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반지는 한 개에 한 가지 기능만을 담아 총 세 개가 제작되었다.
성별 전환, 종족 전환, 나이 전환. 그중 피스가 낀 건 나이 전환 반지였다.
쑥쑥 줄어들어 플레누스를 떠났던 순식간에 열두 살의 몸으로. 어려진 황제를 본 시종장은 어떻게 그가 정체를 숨기고 잘 살 수 있었는지 단박에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이나 같이 살면서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가 황제의 진짜 성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유도.
저 얼굴이 나빴다.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미모가 잘못한 거였다.
휴일이라 업무도 쉬는 날이고 해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려고 벌러덩 누웠다. 더위도 많이 가셔서 슬슬 가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날씨도 좋아졌어. 솔솔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잠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데 누군가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우우으, 누구야?”
큰일 아니면 깨우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풀을 붙여놓은 것처럼 딱 달라붙어있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리니 종종 땋은 머리 꽁지가 보였다.
“나 왔어, 에모. 아, 이 모습일 때는 이게 아니었구나. 푹 잤어요, 에모 님?”
어라? 이 목소리는 익숙한데 어째 되게 오랜만에 듣는, 어어어!
손등으로 눈을 비빈 다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늘어뜨린 미소녀! 플레누스를 떠나기 전의 모습인 피스였다.
“나, 과거로 돌아온 건가? 회귀?”
“아니야, 에모. 내가 황실이 소유한 보물로 변신한 거야. 열두 살 몸으로.”
“우와, 신기해! 이거 환상마법 아닌 거지?”
“응.”
옷도 입는 사람의 체형에 따라 변하는 걸 입었다네. 안 그럼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 난리가 난단다.
“플레누스에 오기 전에 연락한다더니.”
“일이 조금 빨리 끝나기도 했지만, 놀래주려고. 갑자기 나타나는 게 더 기쁠 거 같았어.”
“음, 솔직히 그렇긴 해.”
나보다 조금 작은 피스라니!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경비가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쉽게 들어올 수 있던데.”
“보안마법 다 깔려 있어. 거기에 네가 등록되어 있어서 그래.”
“북부로 떠나고 난 다음에도 안 바꾸고 그대로 둔 거야?”
“응. 그래야 돌아왔을 때 그냥 들어오지.”
내 말을 들은 피스는 갑자기 입술을 꾹 깨물더니 와락 달려들었다. 아쿠쿠! 침대 위라 다행이네.
“얼마나 있을 수 있어?”
“사흘. 밤까지 돌아가면 돼.”
“그럼 그동안 실컷 놀면 되겠다. 뭐 하고 싶어?”
내 질문을 들은 피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오기 전에는 뭔가 하고 싶은 일들이 계속 생각났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까 머릿속이 새하얀 느낌이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좋아. 점심은 먹었어?”
“먹고 왔지. 배가 고프진 않아.”
내가 보기에 지금 피스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다! 신발을 벗겨서 바닥에 곱게 놔둔 다음 옆자리를 팡팡 쳤다.
“일단 낮잠을 같이 자자. 봐봐, 날씨가 정말 멋져. 이제 그렇게 덥지도 않고 바람도 딱 맞게 불어와.”
“어릴 때부터 에모는 낮잠을 즐겼지.”
“대신 자지 않을 때는 부지런하게 살았잖아. 열심히 일했으면 쉴 땐 푹 쉬어야해.”
그러자 피스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면서 베개에 머리를 깊숙하게 묻었다.
“황궁에서는 이렇게 느긋하기도 힘들지. 그래, 누워서 쉴래. 대신 밤에는 야시장 구경을 가자.”
“오늘의 일정은 그거구나. 내일은?”
“롬디아에 가고 싶어. 그다음 마지막 날에는 바닷가에서 놀자.”
“알았어! 음, 매일 다른 모습이면 재미있겠다. 오늘은 열두 살이니까 내일은 열다섯 살 정도로 변해보는 건 어때?”
“그때부턴 키가 많이 커서 여장이 불가능한데. 어음, 시종의 모습을 하면 되려나.”
“보고 싶어!”
강력한 내 요청에 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크흑, 정말 오랜만에 보는 꽃 미소다. 저래서 내가 깜박 속아버렸지. 어떻게 남자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어. 어차피 날 깨우러 오는 건 페티일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니까. 나중에 사정 설명을 해야지.
우리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어릴 때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