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의 기억을 남겨둔 건 그래야 이 세상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야. 에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전쟁은 승리하였으나 밀 농사는 폭망이라! 용사와의 싸움에서 진 마왕이 죽기 직전 뿌린 저주로 대기근이 든 리폴카 제국. 나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는 대륙의 식문화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생의 지식을 간직한 채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면서도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먹지 않는데……. 꼬마 영주님의 대륙판 ‘삼시 세끼’ 프로젝트!
“아기씨는 식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저의 힘이 강하지 않아 환영을 오래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생전 본 적 없는 수많은 음식들이 아기씨의 미래에 존재했습니다. 평생 굶지 않고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며 사실 겁니다.”
정신만 전생의 성인이면 뭐하나, 몸은 아기인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웅, 큰일이다!
2. 미리 보기
“귀여워. 여전하구나.”
“음냐.”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멈춰 피스가 고개를 살짝 드니 어느새 에모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 졸릴 만한 시간이었다.
가면무도회의 입장, 퇴장은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뒷정리를 위해 새벽 3시 정도에는 암묵적으로 끝내게 되어 있었다. 악단이 제국의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모든 참석자들은 놀던 것을 멈추고 나가야 한다.
굳게 닫아두었던 황궁의 성문은 밤 12시가 지나면 여는데 일찍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다. 다만 경비를 위해 나가는 것만 가능하고 다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다. 체력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노부인들은 대부분 이 시간에 집이나 잡아놓은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차근차근 인원이 빠지기 시작해 새벽 3시에는 모두가 퇴장하는 걸로 파티가 끝나는 것이다.
물론 돌아가지 않고 황궁에서 머무는 참석자들도 있긴 했다. 가문에서 큰 공을 세워 황궁에 하사받은 방이 있는 경우에는 그곳에서 쉰 다음, 점심 때 퇴궁한다.
다만 정체를 숨기는 게 가면무도회의 규칙이기 때문에 파티장에서 나와 방에 들어갈 때까지는 입은 로브를 벗을 수 없었다. 자기 방을 못 찾아갈 정도로 술에 취한 이들에게는 시종들이 직접 숙취해소 포션을 먹여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플레누스 백작가는 제국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지만 아직 황궁에 방을 하사받진 못했다. 애당초 황궁에 방을 가진 가문이 스무 곳이 안 될 정도로 수가 적었다.
“에룸에게 연락해야겠군. 여기로 데려올 순 없으니 일단 안아서 적당한 장소로 가야겠다.”
2층 발코니에서 에모가 기절하는 바람에 놀란 그가 바로 텔레포트 한 이 방은 황제의 침실이었다. 전대 황제가 쓰던 정신 사나운 장식품은 전부 다 치워서 황궁의 다른 손님방과 인테리어 차이는 별로 없지만 이 황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리누아.”
“네, 폐하.”
황제의 부름에 답한 그림자 시종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장 안에서 일을 하는 다른 시종들과 똑같은 차림에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휴게실 중 아무도 쓰지 않는 빈방이 있나?”
“네. 황족 전용 휴게실 외에 한 곳을 항상 비워둡니다.”
“텔레포트 좌표는?”
“여기.”
“난 에모를 데리고 갈 테니 드래곤 가면을 쓴 에룸 플레누스를 데려오도록 해. 파트너가 휴게실에서 잠이 들었다 전하고.”
“알겠습니다.”
파티장 안에서 두 사람이 입장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는 에룸이 어떤 드래곤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 바로 기억해냈다. 정원으로 갈까, 아니면 무도회장을 한 바퀴 돌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피스는 담요를 하나 꺼내 에모가 춥지 않도록 돌돌 말았다.
“이건 베르벡의 털로 만든 건가? 익숙한 감촉이군.”
눈을 꼭 감고 있는 얼굴에 양 가면까지 씌우자 나갈 채비가 끝났다. 피스는 뭔가 잊은 듯해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리누아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가면을 챙겼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신비로운 은발이 피스가 가면을 쓰자마자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대량생산을 급하게 해야 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다음부턴 색이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어.”
“기억해두겠습니다.”
황제는 황궁 모든 장소에서 마법 사용이 자유롭다. 애당초 제약은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걸어둔 것이니까. 피스는 에모를 단단히 안은 후 종이에 적힌 방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룸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시종을 보고 잽싸게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같이 오신 파트너 분이 휴게실에서 그만 잠이 드셨습니다. 양 가면을 쓰고 해바라기 치마를 입으신 분이십니다.”
“헉, 누나가 지금 혼자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다만 피곤하신 듯하니 같이 퇴장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에룸은 친구들에게 대충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다음 빠른 발걸음으로 시종을 따라갔다. 그런데 제법 많은 문을 지났는데도 도무지 시종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짝 불안해져서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됩니까?”
“저기 보이는 저 문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다른 휴게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 앞에 서자 에룸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방보다 방범마법을 몇 배나 더 걸어 놓았다는 걸.
‘마스터가 나는 마법 직감력이 남보다 높다고 했지. 타고난 재능은 우리 삼남매 다 비슷하지만 직감력 하나 만큼은 내가 월등하다고. 뭐, 그렇다고 해서 마법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플레누스 삼남매는 안타깝게도 타고난 마법적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마스터가 된 헤키엔과 비교하면 한 3분의 2 정도? 대부분의 남작가, 자작가 자제들이 타고나는 평균 수준의 재능과 마나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 명 다 상재가 뛰어나 본인들도, 주변 사람들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평화로워진 제국에 필요한 건 강력한 공격마법이 아니라 물건이 가득한 시장이니까. 어릴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자신의 누나가 ‘잘하는 사람한테 시키면 돼!’라고 한 게 어떤 의미인지.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커다란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치맛자락을 보니 누나인 에모였다. 미리 들었던 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시종들과 같은 머리카락 색에 가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에룸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인사를 한다고 치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누나, 제발 일어나줘!’
폭신한 쿠션에 볼을 대고 깊이깊이 잠든 누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불편할 게 분명한데도 숙면할 수 있는 건 시종으로 분장한 황제가 예전에 하던 습관대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주는 중이기 때문이다.
양 가면도 탁자에 고이 놓아두고, 신발도 벗겨서 소파 옆에 가지런히 놔뒀다.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던 모습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