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의 기억을 남겨둔 건 그래야 이 세상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야. 에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전쟁은 승리하였으나 밀 농사는 폭망이라! 용사와의 싸움에서 진 마왕이 죽기 직전 뿌린 저주로 대기근이 든 리폴카 제국. 나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는 대륙의 식문화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생의 지식을 간직한 채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면서도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먹지 않는데……. 꼬마 영주님의 대륙판 ‘삼시 세끼’ 프로젝트!
“아기씨는 식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저의 힘이 강하지 않아 환영을 오래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생전 본 적 없는 수많은 음식들이 아기씨의 미래에 존재했습니다. 평생 굶지 않고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며 사실 겁니다.”
정신만 전생의 성인이면 뭐하나, 몸은 아기인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웅, 큰일이다!
2. 미리 보기
“자고 있네.”
꾸벅꾸벅. 피스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채로 졸고 있다. 내가 목욕 하는 사이 기다리다가 잠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곤하면 그냥 말하지.
마법으로 살짝 들어서 내 침대에 눕히니 몸을 또르르 말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롬디아로 가서 잘 거라고 했는데. 어디 보자, 칼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는 게 낫겠지? 방안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종을 꺼냈다.
금색의 작은 종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티팩트라서 모양만 종처럼 생긴 거거든. 마나를 불어넣어 흔들면 롬디아에 있는 세트인 다른 종이 짜라랑 소리가 난다. 피스가 플레누스 저택에서 자고 간다는 뜻이다.
반대로 연락하는 것도 가능한데 그쪽에서 종을 흔들면 여기에 있는 종이 울리고 내가 롬디아에서 잔다는 거다. 아직 어려서 마법을 잘 못 쓰는 아메를 위해 마스터 하이트가 만들어줬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한 번 더 닦은 다음 빗으로 싹싹 빗어 정리했다. 맨날 피스가 해주지만 사실 나 혼자서도 잘 준비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아직 졸리지 않으니까 책 좀 읽다가 피스를 살짝 깨워야지. 저대로 그냥 둘 순 없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이도 닦아야 하니까.
가을밤 공기는 이제 제법 쌀쌀하기 때문에 잠옷 하나만 입기에는 어깨가 시리다. 털실로 짠 카디건을 걸치고 발에는 도톰한 수면양말을 신었다. 소파에 앉아 요즘 유행하는 소설을 집어 들고 막 첫 장을 펼쳤는데 갑자기 침대 쪽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응?”
얌전히 자는 편인 피스가 안 좋은 꿈을 꾸는지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악몽인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책을 탁자 위에 놓았는데 피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싫어, 안 가!”
“으아!”
깜짝 놀라서 무릎을 탁자에 완전 세게 부딪혔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풀쩍풀쩍 뛰는 거보다 피스가 먼저였다. 나는 이불과 베개를 마법으로 흔들어 피스를 깨웠다.
“어?”
눈을 번쩍 뜬 피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아픔이 좀 가라앉아 나는 살살 걸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에모 님?”
“응. 나쁜 꿈 꿨구나. 괜찮아, 괜찮아.”
팔을 벌리자 피스가 날 꼭 끌어안고 작게 훌쩍거렸다. 열두 살은 감수성이 풍부해질 나이지. 등을 토닥거려주자 바들바들 떨던 몸이 곧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릴 때 꿈을 꿨어요. 옛날 집이랑, 아버지…….”
“아버지 얼굴도 이제 희미하다고 했잖아.”
“꿈속에서 생생하게 보였어요. 무서웠어요.”
“막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어?”
“비슷했어요. 재수 똥인 꿈이었네요.”
기왕 꿀 거면 어머니 얼굴이나 봤으면 좋았을 거라며 피스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안색이 별로야.
“차 마실래? 주방에다 말해서 한잔 타달라고 할까?”
“아니요. 찬물을 마셔야겠어요.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가만히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
스승인 마스터처럼 고성능에 어려운 기술이 들어가는 물건은 잘 못 만들지만 의외로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 귀여운 물건은 잘 만드는 헤키엔 작 냉온 주전자에서 찬물을 한 잔 따랐다. 벌컥벌컥 들이켤 기세니까 얼릴 필요는 없겠지.
직접 들고 가서 손에 쥐여주니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피스는 물을 단숨에 마신 다음 소매로 입을 닦았다. 식은땀을 흘려서 머리카락도 다 헝클어졌어.
“따뜻한 물에 목욕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씻고 와. 오늘은 같이 자자. 롬디아에 자고 간다고 연락해놨어.”
“으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저 오래 잠들었었네요.”
시계를 본 피스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몸을 빼냈다. 지금 11시가 넘었거든.
“에모 님, 잘 준비도 혼자서 다 하셨고. 으, 깨우지 그러셨어요.”
“많이 피곤한 줄 알고 침대에 눕혀줬는데 개똥같은 꿈을 꿀 줄은 몰랐지.”
피스는 꿈 내용을 떠올리기조차 싫은지 주먹을 쥐면서 치를 떨었다. 등을 밀어서 욕실로 들여보내고 갈아입을 잠옷을 챙겼다. 피스 방까지 가기 귀찮으니까 그냥 내 거 줘야지!
마침 아버지가 사오셨는데 한 번도 입지 않은 잠옷이 있다. 레이스랑 리본이 잠옷치고는 너무 많아서 부담스러워 그대로 나뒀던 건데, 이거 입으라고 해야겠다. 피스가 입으면 인형처럼 귀여울 거야!
순식간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피스는 반짝거리는 미모를 뽐내며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준 잠옷은 내키지 않은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이거 입고 자야 하나요?”
“응! 예쁘잖아.”
“그건 그렇지만, 에모 님도 안 입으신 거잖아요. 자작님이 수도에서 선물로 사오신 건데…….”
“내 옷은 네 옷이고, 네 옷은 내 옷이야. 내가 머리도 예쁘게 묶어줄게! 자자, 빨리 갈아입어. 얼른 자야지.”
“그냥 제 방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이건 좀…….”
“내가 보고 싶다! 피스, 너의 미모를 썩히는 건 범죄야! 그거 비싼 거라 숙면할 수 있게 향기 나는 마법 걸려 있다고 했어.”
나는 마법이 없어도 매일 잘 자기 때문에 별 필요를 못 느꼈지만 오늘 밤 피스에게는 도움이 될 거다. 피스도 아버지가 이걸 선물로 줄 때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설명을 들었거든. 느릿느릿 갈아입고 나서 내 옆에 후다닥 누웠다.
“보기보다 편하네요. 리본하고 레이스를 좀 줄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디자이너가 수도에서 십 대 영애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데. 우리 취향은 좀 아니다. 그치? 그래도 너한테 잘 어울려.”
“에모 님이 입어도 귀여울 거예요.”
그런가? 뭐, 아직 젖살이 덜 빠져서 볼이 통통한 편이니까. 그래도 피스 같은 느낌은 나지 않을 거다.
옆에 사람이 있으니 침대가 따끈따끈해서 잠이 몰려오네. 피스도 눈이 반쯤 감기기 시작했다. 아, 불 꺼야지. 그런데 피스가 나보다 먼저 마법을 썼다. 순식간에 방 안이 검은 어둠에 잡아먹혔다.
“이제 악몽 안 꿀 거야. 원래 둘이서 자면 악몽이 다가오지 못한대.”
“정말요?”
“응. 나 어릴 때 신관 할아버지가 그랬어. 몽마랑 싸울 때 항상 신관이 두 명 파견되는 건 그 이유 때문이래. 머릿수 많은 거에 못 당한대.”
그러자 무슨 상상을 했는지 피스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킥킥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나 봐. 다행이다. 아, 졸려. 많이 자야 나도 키가 크겠지. 피스, 내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