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의 기억을 남겨둔 건 그래야 이 세상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야. 에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전쟁은 승리하였으나 밀 농사는 폭망이라! 용사와의 싸움에서 진 마왕이 죽기 직전 뿌린 저주로 대기근이 든 리폴카 제국. 나 에우데모니아 플레누스는 대륙의 식문화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생의 지식을 간직한 채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면서도 감자도, 고구마도, 토마토도 먹지 않는데……. 꼬마 영주님의 대륙판 ‘삼시 세끼’ 프로젝트!
“아기씨는 식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저의 힘이 강하지 않아 환영을 오래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생전 본 적 없는 수많은 음식들이 아기씨의 미래에 존재했습니다. 평생 굶지 않고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며 사실 겁니다.”
정신만 전생의 성인이면 뭐하나, 몸은 아기인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웅, 큰일이다!
2. 미리 보기
“아기씨, 뭐 하셔요?”
“책 보기.”
“오늘 본 종자들을 찾고 계셨네요.”
야무지게 에룸의 기저귀 빨래를 마치고 돌아온 페티가 혼자 방에 있는 내 옆에 다가왔다. 그리고 책에 나와 있는 음식 그림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맛있겠다아아아.”
“가을 되면 먹을 수 있어!”
“영주님께서 심으시는 게 전부 쑥쑥 자라면 좋겠어요! 아기씨가 태어난 이후로 항상 영지 농사가 잘되었다고 친구들이 그랬는데. 올해도 풍년이 들면 좋겠네요.”
“응. 배부르면 행복해.”
옥수수 종류를 알기 위해 열심히 단어를 쓰고 또 써서 결국 오늘 본 게 몽땅 무슨 종인지 분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고구마를 찾았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글씨가 나타났다.
[식용 가능하며 매우 달고 맛있으나 뿌리 식물에는 대부분 독이 있다는 편견으로 인해 사람이 먹지 않는다.]
“페티, 책에는 고구마가 먹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근데 상단주 아저씨가 못 먹는 거라고 그래.”
“음, 여신님이 주신 책에 있는 정보가 맞을 거 같아요. 토마토도 그랬으니까요.”
“고구마는 달대.”
“달다고요? 꿀처럼 말인가요!”
“웅, 꿀보단 덜 달지 않을까나.”
“단맛은 귀한데! 으으, 하지만 우리 영지에서는 고구마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일부러 키우지도 않고, 제가 산에는 올라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혹시나 아이들이 산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큰일이기 때문에 어른들과 동행하지 않는 이상 높이는 못 간다. 기껏해야 초입부 정도?
게다가 페티는 내 시녀로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거라 학교 다녀온 뒤에는 대부분 집안일을 돕는다. 나보고 말하기를, 플레누스까지 오면서 산은 지긋지긋하게 타서 10년 정도는 거들떠보기도 싫단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어요, 아기씨. 옷 갈아입고 머리 빗어야죠.”
“응.”
“더그 아저씨가 맛있는 걸 잔뜩 만들고 계셔요. 오늘 저녁은 식탁 다리에 금이 갈지도 몰라요!”
파티를 대신한 저녁이기 때문에 격식을 갖춰야 한다. 페티는 부모님을 일찍 잃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씩씩하지만 여자아이다운 것을 딱히 싫어하지도 않는다. 제법 긴 내 머리카락을 빗겨서 이리저리 모양을 만드는 것도 즐긴다.
“볼루스 상단주님이 아기씨 하라고 예쁜 리본을 잔뜩 주셨으니까 그걸로 머리를 묶지요.”
사락사락 머리카락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오늘의 스타일은 땋기인가. 양 갈래로 나눈 머리가 요리조리 솜씨 좋게 땋은 모양으로 변한다. 페티는 정말 손재주가 뛰어난 거 같아. 엄마한테 배우는 자수도 잘해서 다들 칭찬한다. 목 단추가 뒤에 달린 드레스라 입는 것도 페티가 도와주었다. 등 뒤에 커다란 리본을 솜씨 좋게 묶으면 완성!
“페티, 냠냠 언제 해?”
“글쎄요. 일단 저택을 한 바퀴 돌아볼까요?”
사이좋게 손을 잡고 방을 나와 맨 먼저 응접실로 가보았다. 근데 씨앗들만 정리가 안 된 채로 있고 어른들은 없어. 아래로 내려가 식당에 갔는데도 여전히 텅 비어 있다.
“아빠랑 아저씨 다 없어.”
“그러네요. 음, 일단 더그 아저씨에게 가봐요. 마님은 지금 에룸 님이랑 잠깐 주무시거든요.”
동생이 어려서 아직은 엄마 손이 많이 간다. 모유 수유를 하고 피곤하면 엄마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곤 했다. 억지로 버티려고 하면 몸에 더 안 좋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티가 날 돌봐줘서 조금 더 쉴 시간이 생기셨다.
다행히 부엌으로 가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아기씨, 배가 고프신가 보군요.”
“아니에요! 어른들이 안 계신 거 같아서 온 거랍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재빠르게 페티가 부엌을 방문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식사 전에 잠깐 서류처리를 한다고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구나. 오늘따라 어째 부엌에 못 보던 게 많다? 곡식자루로 추정되는 것들도 몇 개 보이고. 어? 저건 아까 나 준다고 한 옥수수잖아! 책에 적혀 있는 이름은 유리보석 옥수수였다. 생긴 거만큼 이름도 예쁘다.
“아찌! 저 옥수수, 에모 거야!”
“네. 서늘한 부엌 식량창고에 넣어두려고 옮겨왔답니다. 양이 제법 되죠?”
“응! 옥수수, 밭에 심으면 엄청 늘어날 거야.”
“그렇지요.”
응접실에서 볼 때는 알갱이만 조금 있어서 양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많이 가져오셨구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더그 아저씨를 보니 뭔가 도와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예쁘게 차려입어서 음식물이 튀면 페티가 고생할 텐데. 아직 청결마법은 쓸 줄 모른다.
좋아! 깔끔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하자. 옥수수 하면 역시 팝콘이지!
“요리세트 소환!”
페티에게 마법으로 옥수수 두 개만 알갱이를 털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보다 마법이 훨씬 능숙한 그녀는 순식간에 작은 그릇 가득히 옥수수 알을 담아 왔다.
“에모가 옥수수 요리할 거야.”
“이 옥수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응. 근데 요리가 하나밖에 없어!”
팝콘용 옥수수로는 오로지 팝콘만 만들 수 있다. 쪄 먹으면 맛없어. 이건 책에서 본 게 아니라 전생의 지식이다. 달콤한 캐러멜 팝콘은 설탕이 없으니까 요리 불가능. 소금 친 기본 맛으로 만들어야겠다.
크게 만든 냄비에 버터를 슬슬 녹인 다음 옥수수를 넣고 볶다가 잽싸게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살살 흔들어주면, 토도도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어어어! 아기씨, 옥수수가 하얀 꽃처럼 피고 있어요!”
“호오오, 신기하네요. 이런 건 난생처음 봅니다. 책에 있는 요리인가요?”
“응. 아작아작 먹으면 맛있다고 했어! 더그 아찌, 나 치즈가루 필요해!”
“알겠습니다.”
아저씨가 조미료 선반에서 치즈가루를 꺼내는 동안 나는 슬슬 팔이 아파와 냄비를 흔들던 손을 놓고 마법을 사용했다.
“고소한 냄새가 나요, 아기씨.”
“지금 먹으면 앗, 뜨거! 해. 다 됐다!”
통, 토토토통! 튀는 팝콘들이 드디어 춤추는 걸 멈췄다. 눈치껏 더그 아저씨가 커다란 볼을 꺼내줘서 그 안에 수북이 담은 다음 치즈 가루와 소금을 솔솔 뿌렸다.
“먹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음식이기 때문에 하나만 살짝 집어서 조심스럽게 입속에 쏙 넣었다.
“오!”
“으아아아! 옥수수는 이런 맛이네요!”
나도 한 움큼 쥐어 입안에 털어 넣으니 폭신한 부분이 씹히며 아작아작, 바삭바삭. 간만에 들어보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무척 맛있군요. 근데 이건 주식이 아니라 간식 같습니다, 아기씨.”
“입이 심심할 때 먹는 거야.”
“오늘 후식으로 내놓지요. 에모 님, 이 요리의 이름이 뭡니까?”
“팝콘!”
“팝콘, 팝콘이라. 어감도 좋군요. 올해는 토마토 대신 팝콘을 팔아야 되겠습니다! 허허허허허!”
많은 양을 먹지 않으면 배가 안 불러서 토마토만큼 대박은 못 날 거 같은데. 그냥 좀 특이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여간 아저씨가 원래 준비하려던 후식은 꿀에 절인 과일이었는데 팝콘 덕분에 필요가 없게 되어 내일 간식으로 준다고 했다.
옷에 배인 고소한 냄새를 빼기 위해 나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았고 마침 말 타고 돌아오는 아빠가 보여 손을 붕붕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