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성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예수의 말씀을 옮긴다. 이 말씀은 이생에서의 불행이 천상에서의 축복이 되는 종교적 위로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에 따르면,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신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특별한 행운의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불행은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하여서는 오히려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다른 해석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애통하는 자]는 슬퍼하는 자 곧 슬픈 일에 슬픔으로 반응하는 자이다. 인간 세상에는 늘 슬픈 일들이 존재한다. 그 슬픈 일들에 대하여 정직하게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에 머리와 몸을 따르게 하여 반응하는 자. 예수가 복이 있다고 말한 [애통하는 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연민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슬퍼하는 것은 감정의 일 중에서도 고되고 힘든 일이다. 세상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신으로부터 특별히 위로받을 자격을 얻는 이유이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슬퍼함으로써 마음이 고난을 겪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다. 세상 누구도 그의 마음 속 고통을 알지 못하지만, 신은 그것을 알아보고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과 외로움 속에 더욱더 커 나간 그의 아픔을 감싸고 어루만진다. 세상을 위해 슬퍼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겨 이에 충실한 그는, 오직 신에게서만 어떠한 인간에게서도 받지 못한 깊은 위로를 얻는다. 그 위로는 자유와 합일의 감정을 수반하는 완전한 은총의 위로이다.
『슬픔이 맑다』에서 시인이 내보이는 슬픔은 대개 시인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슬퍼하는 슬픔이 아니라 이처럼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슬픔으로 반응하는 슬픔이다. 세상의 슬픔을 슬퍼할 줄 아는 것. 시인은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의 슬픔을 슬퍼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세상에 슬픔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여러 편의 시에서 슬픔을 보라고 말한다. 슬픔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알아야 비로소 그것에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