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이윤석 씨가 한때 박사 학위로 유명해졌을 때, 동료 개그맨들이 그 사실을 치켜세우면서 ‘뭔가 박사다운’ 이야기를 해 보아라고 부추겼을 때, 그가 말한 것은 ‘시뮬라시옹’이었다. 그렇게 흘러 지나가다, 장 보드리야르를 알게 되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 혹은 '하이테크 사회이론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또한 현대이론을 문화와 사회와의 관계로 설명한 급진적 이론가이기도 하다. ‘시뮬라시옹(가장, 위장)’이론은 그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원본과 모사본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말한다. 즉 현대사회는 실재보다는 이미지에 점점 더 강하게 이끌리고 있으며, 어느 순간 실재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는 모두 모사된 것에 불과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차를 살 것이냐, 다른 차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그 정도의 자유 밖에 없다. 이것은 모사된 자유일뿐이다. – 장 보드리야르

사이버네틱스 같은 세계가 도래된 지금, 원래 형태를 지닌 현실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진 현대사회를 ‘복제의 시대’이고, 설사 디지털 세상에서는 원본이 있다 해도 가상성에 흡수돼 버리므로 ‘현실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한 보드리야르의 세계에서는 텔레비전은 전체주의적이고 그것이 배출해 내는 오락과 정보는 소음과 역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 이론을 영감을 받아 창조된 것으로도 유명하나,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매트릭스가 자신이 말한 가상현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물의 체계>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지칭하면서 소비가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동력이며, 나아가 소비주의가 일상의 다양한 측면을 지배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소비 사회에서 넘쳐 나는 사물과 소비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소비는 물질적 풍요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써버리고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그가 말하는 소비란 “다소 일관성 있는 담론 속에서 구성된 모든 사물과 메시지의 잠재적 총체성이다. 소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한, 그것은 기호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활동이다.” 즉, 소비는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기호라는 말이다.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하는 셈인데, 이 문구는 ‘스타벅스’나 ‘애플’의 광고에서 보았던 만큼 친숙하다. 명품들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 역시 상징의 기호로 소비하는 것일 뿐이라는 게, 장 보드리야르의 설명이다.

또한 기호학 방법을 인용한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생활에 있어 장식(인테리어 디자인과 분위기)은 기능적인 공간과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추구되고 있고, 광고와 담론은 이를 이끄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움직임과 사물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의 세계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한 마디로 현대사회의 위선이 자연 질서를 파괴한 셈이다.

그의 이야기 중에 특히나 관심이 갔던 것은 <산타클로스의 논리>를 통해 본 광고의 본모습이었는데, 요약을 하자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가 별것 아니기 때문에 단지 그를 믿는다고 한다. 이미지와 허구를 통해서 아이가 즐기는 것은 꾸며 낸 이야기의 공범자인 부모님들이 쏟는 기적적인 정성과 관심이라는 것. 크리스마스 선물들은 그 대가인 셈이다. 광고 또한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 공고의 호소와 설득이 의식적 차원에서 해독할 수 없는 기호라는 암시와, 개인의 욕망을 알려 주고, 이 욕망을 미리 알고 합리화하는 것을 암시를 함으로써, 개인은 아이가 산타클로스를 믿는 만큼 광고를 믿게 된다고 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사회는 ‘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고 개인들은 욕구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소비를 하지 않고, 대중스타들을 포함한 타인과, 사회 전체의 구조와 질서에 의해 조작, 강요, 통제에 묶여 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하는 소비들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요즘 가장 많이 요구되는 ‘개성’이라는 것도 원래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되는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 개성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집단의 코드에 대한 복종과 가치 기준에의 통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개성이라고 생각하고 소비하고 있는 사물, 물건들은 진정 나의 개성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말이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약간 서늘해짐이 느껴지기도 했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는데, 그들은 그의 저서들이 반(反)계몽주의(obscurantism), 과장법, 알맹이 없는 현학적 전문용어의 뒤범벅과 횡설수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기호를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사물의 체계>를 아우를 수 있는 한 줄이다. 적어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현학적 전문용어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문장과 단어에 길들여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보드리야르의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꺼야.’라는 호기마저도 불충분한 것 같다. 그저 읽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쁜, 이해하는 데에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는,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