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먼 길을 떠나 본 자는 알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길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고 내가 선택할 여지가 있을 때 ‘자유’를 느끼게 됨을. 나는 언어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집이자 돌아갈 곳을 의미하는 조국, 부모, 모국어를 사랑하는 것은 ‘당위’인가. 인간은 진화적으로 ‘보편 문법’(촘스키)을 갖고 있고, 생존 본능으로서 ‘소속감', '공동체의식’이 있기 때문에? '언캐니(Uncanny, 낯익은 낯섦, 프로이트의 유명한 논문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번역한 말)’나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 속의 쾌락, 라캉)’같이 모국어로 적당히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내가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대주의나 스노비즘인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알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본능과 맞물려 있음을 봐야하지 않을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조국 헝가리는 처음에는 독일, 나중에는 소련에 의해 차례로 침략 받았다. 1956년 시민 혁명이 소련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자 20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인들은 조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연루된 남편 때문에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갓난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으로 가득한 가방과 사전이 든 가방 두 개를 들고 국경을 넘었다. 자신이 그간 쓴 작품은 모두 조국에 남겨 두고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뇌샤텔로 망명해 죽을 때까지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공장에서 울리는 단순한 운율의 소음과 작업 속에서 시를 쓰고 집에 돌아와 노트에 정갈히 옮겼다. 어렸을 때부터 읽기와 쓰기에 매료된 그녀는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속에서 힘들게 적응해야 했고, 5년 후에도 프랑스어로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박탈의 삶, 결핍의 삶, 부자유의 삶. 같은 언어를 써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데, 아주 간단한 말조차도 소통할 수 없을 때 나라는 존재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이 자전적 이야기 속에서 나는 모국어 사랑의 한 원인을 추론해냈다. 모국어를 잃은 ‘사막’이자 ‘문맹’의 환경은 '존재 의미'와 '자유'를 잃은 상태라는 것을.

“나는 헝가리에 내 비밀 작문 노트뿐만 아니라 처음 쓴 시들도 놓고 왔다. 나는 그곳에 나의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잘 있으라거나 또 보자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1956년 11월 말의 어느 날, 나는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ㅡ 「기억」 중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중략)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게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ㅡ 「사막」 중

이 환경은 헝가리가 소련의 지배를 받았을 때 기숙학교에 있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억지로 소련의 문학과 역사와 지리를 익혀야 했던 때와 비슷했다. 저항의 방식으로 선생들이 열정 없이 가르치고 학생들이 배웠던 시간이 그녀의 망명 이후 다시 반복되었다.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익숙하게 먹던 음식과 너무 다른 환경 때문에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1년 동안 점심 식사로 빵과 우유를 탄 커피만 먹었다. 자유를 위해 왔지만 상상 이상의 부자유로 채워지는 나날. 사전 도움 없이는 아이에게 계속해서 "모른다"를 말했던 비참함.
모국어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배웠던 시간은 이제 그녀 속에만 존재했다. 자신이 지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을 준 시간은 오로지 그녀 속에만 존재했다. 모국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적절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것들은 죽는다. 그래서 그녀는 프랑스어를 적(敵)의 언어라고 부르며 이 언어와 평생 격렬하게 싸웠다.

망명한 사람들 중에는 더 멀리 떠나가거나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망명하지 않았다면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확신한다. 헝가리가 아닌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자신은 글을 썼을 거라고. 쓰는 대신에 읽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을 때 가책을 느낄 정도로 ‘쓰기’에 몰두한 자. 그 ‘쓰기’는 자신을 알고 표현하기 위한 ‘자유’였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제1부 「비밀 노트」, 제2부 「타인의 증거」, 제3부 「50년간의 고독」 합본의 국내 번역 제목)을 필독서로 꼽는 이유는 작가들의 언어와 정체성 간의 상관관계를 말해 주는 텍스트로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왜 쓰는지 왜 떠나는지 왜 세계가 온통 이 지경인지 치열한 고민 없이 쓰고, 떠나고, 그저 살 뿐이라면 거기 '쓰는 자로서의 자'가 있을 자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