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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평전
글쓴이
신채호 저
출판사
BOOKK(부크크)
출판일
2018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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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신채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책 소개

분야역사
이순신 평전 : 신채호 역사 인물 전기

[필독서] 역사 인물 평전
(평생 소장 역사서)

1. 신채호 작가 '탄생 136주년' 기념판!
2. "조선혁명선언" 연세대 추천도서 200권 선정 필독서

* 신채호
申采浩 (1880∼1936) 항일 독립투사·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 광무 3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들어가 논설을 쓰기 시작, 독립투쟁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에 앞장섰다.

1910년부터 1936년까지의 망명생활 중에 우리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면서 우리 민족의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조선상고사, 조선상고 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이 이 때에 기초되었다.

1928년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북경회의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여순 감옥에 복역하다가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 이순신 인물 탐구 ===
* [이순신]
李舜臣 (1545 1598) 조선 선조 때의 명장(名將),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변(邊)의 후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에서 항상 대장이 되었으며 동네에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지었으므로 동네 사람이 다 두려워하였다. 그는 뜻을 무예에 두어 기사(騎射)를 연습, 훌륭한 재능을 연마하였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 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축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대패하여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 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싸움터에 도착하였다.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얕잡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에 그는 적은 배로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섬멸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는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 등을 볼 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나라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적 영웅이며 은인이었다.

* 일러두기
‘신채호’ 작가의 원작 그대로 토속어(사투리, 비속어)를 담았으며 오탈자와 띄어쓰기만을 반영하였습니다.(작품 원문의 문장이 손실 또는 탈락 된 것은 ‘X’, ‘O', ‘?'로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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