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향한 노대가의 열정,
한국 사회사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
세계적인 석학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의
50년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50년 동안의 열정을 다한 한국사 공부를 집대성한 신작『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신라시대 초기에 생겨나 가장 대표적인 사회 단위로 뿌리내린 한국 고유의 출계집단(씨족 또는 족, 겨레라 불리는)에 초점을 두고,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친족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내구력을 부여했다. 중국에서 차용한 과거제와 신유학은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 엘리트의 월권에 제약을 가하기는커녕 괄목할 만한 방식으로 엘리트의 지배를 강화했던 것이다. 도이힐러 교수는 신유학의 변혁능력을 강조한 기존 한국사의 관점은 이 토착적인 친족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간과했다고 한다. 엘리트에게 유교식 사회의 윤곽을 제시한 신유학은 종종 후기 조선사회의 경직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것은 신유학이 아니라 내구성 있는 친족 이데올로기였다.
저자는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선택하여 그들이 만들고 다진 촘촘하게 짜인 사회구성을 들여다본다. 예컨대 내앞의 의성 김씨, 유곡의 안동 권씨, 주천의 진성 이씨, 둔덕의 전주 이씨, 안터의 순흥 안씨 같은 집단과 행동했던 개인들에 대한 내러티브에 지성사,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를 엮어 넣는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경제적·지적 문제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저자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는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신흥사대부 조선 건국론’에 대해 신흥사대부의 출현은 애초에 없었다며 고려의 세족(世族)이 조선의 사족(士族)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점, 고려 말의 권문(權門)과 세족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기 때문에 권문세족이란 용어는 폐기하자는 점, 당쟁은 정치적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층의 신분과 신분 유지에 직결된 사회적 현상이었다면서 붕당의 끈질긴 생명력은 친족 집단과의 관련성이 기인한다는 점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왕조의 경계를 뛰어넘은 친족 이데올로기의 검토에서 얻어지는 저자의 통찰이,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나아가 그 유구한 역사의 성격과 작동방식을 다시 평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사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라 할 만하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1960년대에 한국에서 조사 및 연구를 수행한 최초의 서양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해외 한국학을 선도하는 학자로, 중요한 저서 몇 편을 쓴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상을 다수 수상했다. 저자는 역사와 사회인류학의 방법론을 결합하여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와 사회를 관통해온 메커니즘을 재평가하는 참신한 틀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