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리즈벳.”
신이 되어버린 남자, 윈터.
절실하게 원하였으나 결코 갖지 못했던 ‘그’ 감정과 느낌을 소녀에게서 발견하였다.
오로지 파괴와 살인밖에 모르는 그에게
너무나 기적같은 구원이기에
감히 욕심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갖고 싶다.
그 ‘사랑’을.
흑과 백에서 벗어난 세상은 따듯했다.
수천 가지의 색과 수만 가지의 채도로 이루어진 세상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고하고 있었다.
살아 있어. 넌 살아 있어.
그리고 그 속에서
소녀는 기적처럼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2. 미리 보기
“윈터는 내가 애로 보이지요.”
윈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말 한마디 없어도 뭘 그리 당연한 말을 하냐는 뜻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스스로가 한 말이 얼마나 애처럼 들리는지 깨달은 리즈벳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윈터가 생각하는 것만큼 애가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말꼬리는 한없이 기어들어갔다.
분한 감정은 어쩔 수 없으나 그녀는 현실 파악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머리에 눈덩이 한 번 맞히지 못하는 어린 계집애일 뿐이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멍청하고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기를 쓰고 맞먹으려 드는 그 모자람으로 주인을 즐겁게 하는 애완견 정도의 위치다.
……오늘 눈싸움만 봐도 그렇다.
“윈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보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자꾸 애 취급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이제 곧 열세 살이란 말이에요. 이 나이에 벌써 약혼하거나 도제로 들어가는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이거 실례를, 레이디 리즈벳 클렌디온. 이 우매한 칼잡이는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를 애 취급이나 했으니.”
……애 취급하고 있다. 완벽히 무시하고 있다.
매끄럽게 흘러나온 예의를 가장한 놀림에 리즈벳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윈터라면 그녀가 우습게 보이겠지. 윈터는 대단하니까. 신의 힘을 빌린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근대의 역사를 바꿔온 위인이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는 내용을 듣고 있자면 그녀의 짧은 지식으로도 그가 아는 게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할 줄 아는 언어가 네 개였고, 대륙의 역사는 고대 시대부터 줄줄이 꿰고 있었다. 웬만한 질문에는 죄다 막힘없이 답하는 걸 보면 단지 언어와 역사만이 아니라 다른 쪽에도 해박하다는 걸 알겠다. 그냥 머리가 좋은 것뿐만이 아니다. 쌓아온 시간의 차이다.
……언제쯤이면 저 사람이 진지하게 대해줄까. 몇 살을 더 먹어야, 얼마나 더 유능해져야.
입술을 꽉 깨문 리즈벳은 윈터를 홱 쏘아보았다. 저를 재미있어 죽겠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자 그녀의 눈꼬리가 휙 치켜올라갔다.
“지금은 그렇게 빈정거리지만 두고 봐요! 좀만 지나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만큼 아름답고 섹시한 레이디가 되어 윈터한테는 눈길 하나 안 줄 테니까! 그때 돼서 예전에 좀 더 잘할 걸, 땅을 치며 후회해봤자 늦어요!”
“이 나이에 벌써 걸어 다니는 대량 살상무기가 되는 걸 장래 희망으로 삼다니 역시 네 기발함은 경이롭군, 나의 사랑스러운 레이디 리즈벳.”
여전히 매끄럽기 짝이 없는, 놀림임이 분명한, 그럼에도 분할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는 윈터의 눈이 살짝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자 그녀는 순간 심장이 턱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녹여내는 듯한 웃음.
그리고 저도 모르게 뱀 앞의 다람쥐처럼 얼어붙어버린 그녀에게 조금 더 눈꼬리를 접어 미소를 짙게 한 윈터가 난로 쪽을 턱짓했다.
“그 전에 끓어 넘치고 있는 코코아부터 어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으악!”
세심하게 비율을 맞춰 끓이고 있던 코코아가 넘쳐흐르는 참사에 리즈벳은 튕기듯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주전자를 불에서 내렸다. 앗 뜨거, 앗 뜨거를 연발하며 겨우 상황을 수습한 후에야 절 보며 킥킥대며 웃는 윈터가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리즈벳은 끓어오르는 속을 삭히며 전투적으로 코코아를 컵에 부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타오르는 난롯불을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며 도전적으로 코코아를 홀짝이는 리즈벳을 흘끗 바라보던 윈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가 눈치채기 전에 다시 시선을 돌린 윈터는 쌓아두었던 장작을 던져 넣었다.
휙, 불 속으로 던져진 장작이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부지깽이를 쥔 윈터가 몇 번 능숙하게 들쑤시자 타오르고 있던 장작이 딱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지더니 확 열기가 솟아올랐다. 일련의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리즈벳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불 피우는 게 능숙하네요.”
“지금에야 대륙 남부까지 뻗어 내려왔지만 본디 인스켈은 북방왕국이다. 밤사이 얼어 죽지 않도록 밤새 불을 피우고 지키는 건 남자라면 어렸을 때부터 배워오는 기술이지.”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말에 리즈벳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스켈에서는 불을 남자가 지켜요? 지금까지 유모들은 전부…….”
“여자에게 불을 지키게 하는 건 중부국가인 로세이유의 풍습이다. 인스켈은 추운 데다가 산세가 험해서 먹이를 구하러 산짐승들이 민가를 덮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약하고 소중한 것이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게 밤을 지키는 것은 인스켈에서 사내로 태어난 이들의 자부심이다. 불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소년과 사내를 가르는 징표지.”
타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이 조용히 타들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난로의 일렁거리는 불빛은 색이 없는 윈터의 얼굴을 물들이는 듯했다. 그것이 마치 윈터를 살아 있는 듯 보이게 했다.
그 모습을 리즈벳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상대를 백만 가지 방법으로 물 먹여주고 싶다 별렀던 생각은 어느새 잊혔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상대가 달라 보이는 이유는 난로의 불빛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내뱉는 말 때문일까. 그녀는 윈터가 조국(祖國)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처음 들어봤다.
“그 풍습은 산짐승에게서 가족을 지킬 필요가 없는 수도의 귀족들에게조차 남아 있다. 인스켈의 남자들은 불 옆에서 밤을 지새우며 아들을, 동생을 가르치지. 북방을 개척한 민족으로서의 역사, 교훈, 전승되는 풍습, 노래, 가르침, 그리고 제대로 된 남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존감, 지혜, 책임감.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어미가 다정함과 자비와 화합을 가르치고, 밤의 어둠을 함께 밝히는 아버지는 그 어미와 그녀가 가르치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강함과 비정함을 가르친다. 인스켈을 몇백 년간 지탱해왔던 가르침의 전승이란다, 귀여운 리즈벳.”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 묻어 있는 감정은 분명한 긍지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밝힌 그런 수만 번의 밤이 인스켈이라는 나라를 빚어냈지. 이 나라는 고난에 꺾이는 것을 거부한 이들의 나라야. 정령과 소통하는 에스타니아 정령사들의 주술도,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평원과 부동항을 독차지한 로세이유의 풍요로움도, 스승에서 제자를 통해 몇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리슈타인의 지혜도 가지지 못한 채, 좀 더 나은 삶을 후세에 남겨주겠다는 일념만으로 중부의 안온함에서 벗어나 북부의 산지로 옮겨간 민족이지. 삼면에서 끊임없이 공격받고, 결국엔 로세이유의 속국으로 전락하면서도 끝까지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싸우다 결국 대륙의 패자가 된 이들의 나라란다, 사랑스러운 리즈벳. 우리는, 그 긴긴 밤 동안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모든 적습을 막아내며 우리의 사랑스러운 것들을 지켰어.”
막힘없이 내뱉는 말은 속삭이는 듯 나직했으나 기묘하게 듣는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평소보다 반 톤 낮은 목소리, 가볍게 떨어트린 시선, 입가에서 묻어나는 부드러운 표정, 그 모든 것은 마치.
“윈터는, 인스켈을 사랑하나 봐요?”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듯해서.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마주 보는 모습에 그녀는 어쩐지 듣지 않아도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이윽고 천천히 가슴을 치는 깨달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해했다.
그래서 윈터는 신체가 되었고, 그 오랜 시간을 인스켈을 위해 싸워왔던 것이다. 그 많은 전장에 나가,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아니라는 욕이란 욕은 모조리 다 얻어먹으며. 원한다면 분명히 대륙을 지배하는 왕이 될 수도, 세상의 모든 보화를 죄다 손에 넣을 수도, 그 어떤 상상보다도 더한 사치를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했다는 기록 하나 없이 지금까지 그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나라란 그런 게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레 소속되어, 좋든 싫든 그 구성원으로 분류되어 그로써 따라오는 혜택과 적의를 받으며, 저절로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그렇게 나라가 나이고 내가 나라이면 좋든 싫든 그것은 사랑스러운 것이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윈터.”
답을 받았으면서도 리즈벳은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한 느낌에 몸을 곧게 세워 윈터를 직시했다.
뭘까, 이 감정은. 어째서 이렇게도 슬프고, 답답하고, 안타깝고, 화가 나고.
그녀는 윈터 드레스덴에 대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고, 며칠씩이나 밤을 새워가며 그에 대해 이해하려 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애국심이라는, 전장에 나가는 남자라면 당연히 가질 법한 감정을 윈터와 연관시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인스켈은, 당신에게 그만큼의 보답을 해줬어요?”
유모들을 따라 이사를 다니면서 몇 번쯤 인스켈의 땅을 밟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윈터 드레스덴에 대한 소문은 속국과 별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무서워했고, 묘하게 꺼리고 있었으며, 그 어떤 긍정적인 감정과도 연관시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가 윈터였다면 절대로 이런 나라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국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그녀의 입장에서 한 가정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윈터처럼 태어날 때부터 이곳이 내가 속해 있는 곳이라는 소속감을 안겨준 곳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망연히 제가 인스켈인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인스켈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윈터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유모들부터가 인스켈 출신이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사는 곳을 옮겨다니는데 어딘가에 소속됐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지끈,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남들이 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족에게조차 소속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전, 좀 더 어렸을 때에는 오라비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정말로 오라비의 친동생이라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작 안셀라는 그녀에게 해준 것 하나 없었건만 그때의 진심은 얼마나 절박했었나.
윈터도, 같은 것에 매달리는 걸까.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를 바라본 윈터가 입가를 살짝 비틀어 조소하듯 웃었다.
“……영리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됐구나, 귀여운 리즈벳. 그래서 말했잖아,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한 게 아니라고.”
평소와 다름없이 비아냥거림과 놀림을 반반 섞어 하는 말에 리즈벳은 가만히 시선을 들어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답을 하는 대신 지어 보인 언제나의 조소는 그야말로 가면과 같아서 그녀는 윈터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좀 칭찬을 칭찬답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많이 컸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윈터에게 장단을 맞춰 평소와 같이 볼을 부풀려 보일 뿐이었다.
“영리한 리즈벳.”
그녀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윈터의 붉은 눈동자가 어딘가 다정한 빛을 띠며 깊어졌다. 길고 가는 흰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해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날 때엔 기울 대로 기울어서 말이지,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불가로 불려와 적에게서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배웠어. 아버지와 형이 둘 다 죽어버렸을 경우 남아 있는 것들을 내가 지켜야 하니까. 그게 대체 몇 년 전이지? 80년? 이젠 100년이 되어가나? 그때부터 계속 그렇게 살아왔으니 익숙해진 것뿐이야.”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오래 함께하다 보면 사랑스러워져. 기왕에 목숨을 걸 거면 사랑하는 것을 위해 거는 편이 좋으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사랑스러워하던 것은 하루아침에 아무 의미도 없게 되지는 않아.”
그 말은 목을 졸라매듯이 답답했으나 동시에 단순히 어리석다 단언할 수 없게 하는 묘한 점이 있었다. 한동안 어쩐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정에 그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던 리즈벳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윈터는, 정말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도, 얼마나 손해 보는 일이라도, 얼마나 덧없는 일이라도.
적어도, 무언가를 사랑스럽다 생각하고, 그에 얽매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호구네요.”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