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소멸 사이를 떠도는 언어의 순례자
2013년 첫 시집 『희다』 이후, 5년 만에 이향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침묵과 소멸 사이를 떠도는 순례의 여정을 정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텅 비어가는 몸을 가누지 못해 삶이 마냥 서운한 여인아 […] 당신 몸을 흔들면 출렁일 저 그늘의 바림(gradation)을 어쩌려고, 내내 눈을 감고만 있는가. 몸을 기울면 콸콸 쏟아질 저 그늘의 마음에 우리는 무어라 이름 붙일 것인가” 첫 시집의 해설에서 양경언 평론가가 던진 질문에 두 번째 시집 『침묵이 침묵에게』는 그 ‘그늘의 마음’을 ‘침묵’이라는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고요의 상태’ 속으로 옮겨둔다.
물컹한 어둠이 덩어리째 왔다 갓 태어난 짐승의 새끼에게서 나는 냄새를 가지고 왔다 실핏줄 같은 온기가 있어 물기가 맺히는 듯했다 축축한 어둠을 주무르자 붉은 길이 생겼다 길을 따라 뿌리가 품었던 말이 제 몸을 찢고 나오는 걸까 한밤에 새끼를 낳아본 어미의 몸부림처럼 몸을 비틀어 나무는 붉은 꽃을 낳고 있다
「어둠 덩어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