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이 스스로의 이론을 세우며 남긴 영혼의 기록
칼 구스타프 융이 손수 책의 형태로 묶은 『RED BOOK』은 가장 늦게 읽혔다는 점에서 융의 ‘유작’이다. 융이 1959년 이 책 말미에 남긴 ‘에필로그’를 보아서는 출판할 뜻도 가지고 있엇던 것 같지만, 결국 이 책은 미완으로 남겼다. 그러다 1961년 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이 원고는 유족에게로 넘어갔고, 학자들이 이 원고를 처음 접한 것도 2001년이 되어서였다. 그 후 출판업자들과 융의 후손들 간의 오랜 줄다리기가 벌어진 끝에 2009년에야 독일과 미국에서 처음 대중을 접하게 되었다.
『RED BOOK』은 융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관한 기록이다. 후에 나온 그의 이론들은 모두 이 책에서 잉태되었다. 이 책을 쓰는 16년 동안에 융은 원형, 집단무의식, ‘개성화’ 이론 등을 개발했는데, 이 책에는 그 근본적인 형태들이 모두 담겨 있다. 융이 말하는 원형(原型)이란 사람, 행동 또는 성격의 모델들을 일컫는다. 융은 사람의 정신이 3가지 요소 즉 에고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다. 에고는 의식이며, 개인 무의식은 억눌렸던 기억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 하나의 종(種)으로서 공유하는 지식과 경험을 말한다. 융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에서 원형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융은 원형의 대표적인 것으로 억압된 약점·단점·본능 등으로 이뤄진 무의식인 그림자와, 남성 속의 여성인 아니마, 여성 속의 남성인 아니무스, 사람의 외적 성격인 페르소나 등을 들었다.
이 책은 융의 환상에 두 사람이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엘리야와 살로메다. 거기에 검은 뱀이 등장한다. 엘리야는 융의 영혼을 안내하는 정신이고, 살로메는 융이 억누르고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이다. 엘리야는 나중에 필레몬이라는 마법사로 바뀌어 차원 높은 통찰을 보이며 이미지로 소통한다. 이 이미지는 개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융은 그것을 집단 무의식의 산물로 보고 있다. 융은 당시 독단적인 행태를 보이던 교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런 배경을 알고 책을 읽으면 영혼의 본질, 사고와 감정의 관계,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계, 기독교의 의미 등에 대한 융의 관점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