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라는 존재 조건을 은밀하거나 선정적이지 않게, 그러므로 보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으로 꿰뚫어보고자 했던 시인 김정란의 시들은, ‘삶’이라는 예외상태를, 안락하고 통속적으로만 대면하고자 했던 자들에게, 깊은 일격이 될 수 있다. 여성 시인으로서 한국 시단이라는 남성중심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에 하나의 당대적이고 지속적일 도발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을 통한 김정란 시인의 등장은 하나의 파문과 다르지 않았다. 감성의 안락한 발설과 감정의 낯익은 배설이라는 시적 기대 -당대 여성 시인들에게 공공연하게 강요되었던 바로 그 기대-를 배반하고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그의 첫 번째 시집은 단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불문학자, 번역가, 비평가로서도 의미 있는 행보를 걸어온 저자지만, 그녀가 당위적/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오독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의 중심에는 ‘시인’으로서의 그것이 있었음을, 이 시집은 다시 한번, 그러나 처음과 같이 새롭게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