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라는 용어는 같이 사용하지만 그 용어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마치 천주교나 이단들이 우리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다른 것과 같다. 구약에서도 누구의 하나님을 믿는가는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은 이방 민족이 숭배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용어의 ‘개념’이 중요하다. 용어가 같아도 개념이 다르면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나타나는 신앙 용어의 혼란은 가정에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자녀가 이해하는 신앙 용어와 부모가 이해하는 신앙 용어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야기를 하면 교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배에 대한 개념, 찬양에 대한 개념, 전도에 대한 개념, 은혜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개념이 다르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갈등과 논쟁만 심해진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가정과 교회와 기독교 커뮤니티(Community)는 같은 용어만 사용할 뿐 내용(개념)이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 집합소가 되고 말았다. 각자 자기 소견대로 정의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 통합(WCC)이 이미 신자의 가정과 교회와 교단과 선교 단체에서 이루어진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개념이 불분명한 신앙 용어 사용에 대하여 프란시스 쉐퍼는 “힌두교의 비슈누(Vishnu)라는 이름 아래 만나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이제 기독교 안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용어들은 의미가 불분명한 ‘기호’로 전락한지 오래 되었다. ‘오직 예수’라는 표현의 의미는 불분명하며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쉐퍼의 표현처럼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아무런 내용 없는 표상(表象, 대표적인 상징)’에 불과하다. 그 결과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와는 정반대되는 표상에 다양한 개념이 혼용된다. 민중의 대변자 예수, CEO 예수, 신비적 체험을 주는 예수, 병 고치는 예수, 신비한 초능력을 주는 예수 등과 같은 다른 예수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