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당신이 내 전부요, 당신이 내 의미고,
당신이 나를 살게 해줄 거요.
숨이라도 쉬어야 했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파도 아프다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힘겨운 길을 그대는 함께한다 하였다.
참으라 하였다.
버티라 하였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랬기에
왕이 되고자 한다.
나의 반려伴侶여.
저 너른 바다가 되어 예선국을 품으세요.
빛나는 햇살이 되어 예선국을 비추세요.
그리하여 빛을 품은 바다가 되어 예선국을 품에 안으세요.
저에게 그러신 것처럼요.
2. 작가 소개
류향
필명은 오렌지향기.
서울 태생.
제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즐거움을 드리는,
항상 기억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뼛속까지 로맨스 마니아.
언제나 해피엔딩을 꿈꾸며
신영미디어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 출간작
빛과 그림자
The Gift
류향
Dear My Rose
Golden time
The Good Man
CREEP
광해
SUMMER
3. 미리 보기
아름드리 자라난 소나무 가지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참새들이 요란하게 짹짹거렸다. 방년 열아홉 살, 휘는 뒷짐을 진 채 한가롭게 지저귀는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의선왕후 중전 심 씨의 부름으로 잠시 담소를 나누고 혼자 처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날씨는 초여름인데 왠지 스산한 바람이 텅 빈 그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들의 지저귐을 듣기만 했다. 그런데 그 지저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휘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르고 말았다.
혼례라…….
중전 심 씨는 휘를 불러 그에게 혼례에 대한 말을 꺼냈다. 어릴 적 어미, 조빈 김 씨를 일찍 여읜 임안군, 현과 무안군, 휘를 제 품에 거둬들였던 중전 심 씨. 자식을 낳지 못한 그녀는 두 아이 중,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총명한 휘에게 각별한 정을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중전 심 씨의 그늘진 표정은 임안군의 혼사 때보다 더욱 짙어져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중전 심 씨의 눈물 감춘 표정이 떠오른 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명치끝에서 답답함이 뭉쳐져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뭘 하는 것이냐?”
갑자기 뒤에서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툭 날아왔다. 휘는 어느새 웃는 얼굴로 뒤돌아 형, 임안군을 맞이했다.
“뒷모습을 보니 꽤나 울적해 보이더구나.”
“그리 보이셨습니까?”
임안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휘의 뒷모습을 보아하자니 분명 뭔가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웃는 낯이라니. 한 살 어린 아우, 휘를 볼 때마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저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뭐든 성마르게 입에 올려 불필요한 분란을 만드는 임안군과는 달리 휘는 진중하고 또 입이 무거웠다. 형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뭐든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휘는 자신의 생각은 접어두고 그저 임안군의 안색을 살펴보다 그의 얼굴이 며칠 전보다 더 창백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탕약이 차도가 없으신 거 아닙니까?”
임안군은 신경질적으로 바짝 마른 손가락을 들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언제 안 아픈 적이 있었나? 무슨 약을 먹어도 타고난 기질도 그렇고, 심병이 있으니 아플 수밖에. 그런데 오늘은……. 흥!”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임안군은 싸늘한 코웃음을 치며 입을 다물었다. 왕께 아침 문후를 드리려 입궐했다가 궐 밖에서의 부적절한 행실로 인해 왕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들은 터라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서운했다. 왕을 뵐 때마다 미운 털이라도 박힌 듯 무조건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임안군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데, 왕은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 표정과 말씀이 오늘따라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임안군은 저도 모르게 얇은 입꼬리를 고약하게 말아 올렸다. 노골적인 불만이 실려 있는 입술이었다.
그런 임안군을 보며 휘는 여전히 입술에 살짝 웃음을 맺고 있었다. 임안군의 분위기에 동조하면 그는 분명 앞뒤 가리지 않고 메마른 화를 쏟아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임안군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자주 앓아누웠었다. 그런 사람들의 특성상 임안군도 성마르고 괴팍해졌다. 자신의 몸이 불편한 탓에 남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성장함에 따라 군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인 인내심은 허약한 기질로 인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해도 궁의 시간은 흐르긴 흐르나 보다. 너에게도 결국 혼사가 코앞으로 닥쳤으니 말이다.”
뜬금없는 시간 타령에 휘의 입가에서 웃음이 조용히 사라졌다. 임안군의 속뜻이 휘의 혼사에 있지 않다는 것이 피부를 예리하고 따끔하게 자극했다. 그는 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작년에 혼례를 치른 임안군은 궁궐 밖 사저로 나가 지내며 하루에 한 번 문후를 여쭙기 위해 들어왔다. 그리고 궁에 들어오면 매일 새로운 소식들을 수집하느라 열을 올렸다. 그 소식이란 바로 세자 책봉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주인을 기다리는 자리, 세자.
모든 상황에 촉각을 세우는 바람에 가뜩이나 신경이 쇠약한 임안군은 하루하루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직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탓이었다. 왕의 춘추가 30대 후반이지만 중전 심 씨와의 사이에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반면 왕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받는 후궁들이 늘어가고 그들이 생산을 함에 따라 군들과 옹주들도 점차 늘어갔다.
슬슬 궐내에서는 왕의 춘추가 마흔이 넘어가면 후궁의 소생들 사이에서 세자를 정해야 할 거라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고 있었다. 후궁 소생들 중 장자인 임안군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가 장자인 만큼 적자가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가 세자에 오를 가능성은 높다 믿고 있었다.
휘는 그런 염원이 담긴 임안군의 메마른 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빛도 저리 메말라 있을까 싶었다. 임안군은 어미가 휘를 생산 후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궐내에서 자신들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했었다. 어미가 살아 있을 때는 부왕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후궁이었기 때문에 이들 형제에게도 각별한 관심이 쏟아지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무심하다고 어미가 죽은 후 차츰차츰 이들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부왕의 애정을 한 몸에 받던 어미가 죽으니 자연스럽게 부왕은 다른 여인을 향했고 줄줄이 동생들이 태어났다. 희저궁, 신빈 박 씨. 지금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은 신빈 박 씨였다.
임안군은 시선을 들어 담 너머 보이는 희저궁을 노려보았다. 저 안에 요사스러운 신빈 박 씨가 있었다. 죽은 어미 대신 부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신빈 박 씨를 노려보는 듯한 임안군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자신의 자리임이 분명한데, 세자 책봉이 이리 지지부진한 것이 바로 신빈 박 씨의 소생들이 줄지어 태어난 탓이라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때 휘가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임안군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혜민서에 한번 가시겠습니까? 근래 새로 들어온 의원 하나가 실력이 꽤 좋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가 모시고 갈 테니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임안군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주변을 살피더니 휘에게 바짝 한 걸음 다가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네 혼사에 대한 이야기 들었다. 판윤(判尹, 한성부의 으뜸벼슬로 정이품.)의 딸이라고? 나에게도 그러더니 너에게도 역시 고작 그런 집안의 여식과 혼례를 하게 하는구나.”
“혼기 적당한 처자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내 이번에 들은 게 있다.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세를 실어주지 않으려고 한다는구나. 한성부 판윤이라고 해봤자 몇 달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고작인데, 참.”
임안군의 목소리가 나직하고 불만스럽게 깔렸다. 휘는 미간을 좁히며 임안군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대꾸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형님?”
그러자 임안군은 답답하다는 듯 창백한 얼굴에 붉은 노기를 드러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세간에서는 청안군이 세자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하더구나. 너와 나는 물 건너갔다고 말이다. 우리의 혼례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이뤄진 것과 다르게 청안군의 혼례가 일찌감치 내정된 것을 보면 그렇지. 다들 우리를 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놈의 혼처는 좌상 대감의 여식이 아니더냐?”
뜻밖에도 휘는 빙그레 웃어버렸다.
“왜 웃는 것이냐?”
“그런 말을 아직도 귀에 담고 계십니까? 아바마마께서는 아직 적자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혼례만으로 청안군을 세자로 책봉할 거라 억측을 한단 말입니까?”
“억측이라고?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바마마께서 적자를 원하신다고? 항간에는 중전마마께서 아이를 생산하지 못할 거라는 말도 들리는데.”
“형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순간 휘의 언성에 차가운 노기가 스며들었다. 임안군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도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얇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병약하고 기질적으로 신경이 쇠하여 자신의 판단보다는 남의 말을 귀에 잘 담아두는 임안군이었다. 그런 임안군을 연신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은 부왕이었다. 어미의 죽음 후 빠르게 다른 여인의 치마폭에 휩싸인 부왕의 탓이 컸다. 왕실의 손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혼례를 통해 인맥을 맺고 왕실의 버팀목을 만드는 일. 왕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임안군은 아비가 어미를 너무도 빠르게 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정한 아비는 이제 이들 형제마저 잊은 것처럼 보였다. 받쳐줄 세도 없는 이들 형제를 아비도 잊어버리면…….
그러면서 정작 자신도 혼례를 치러놓고 다른 여자의 치마폭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비를 쏙 빼닮은 임안군이었다. 문후를 드린 후 궁궐을 나서면 도성 유명 기생집을 찾아가 꽃 같은 기생들을 모아놓고 술을 즐기며 대취할 때도 꽤나 많았다. 그가 머리 올려준 기녀도 여러 명이었다. 그로 인해 작년 혼사를 치른 군부인 김 씨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임안군에게 뭐라고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임안군은 남의 충고나 조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성을 내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 일들은 이들 형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에 의해 속속 왕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임안군은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고 그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휘는 그런 마음은 내색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임안군의 마른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런 풍문은 귀에서 털어버리시고 저와 함께 혜민서로 가시지요. 가서 그 의원에게 진맥을 한번 받아보시지요.”
“흥! 어의도 고치지 못하는 내 몹쓸 기질을 고작 혜민서 의원 따위가 어찌 고치겠는가? 그래도 네가 혼례를 치르면 사저로 나올 테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구나. 적적했는데.”
임안군의 말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휘는 그의 불만을 차단하기 위해 다시 그의 손을 잡아끌며 처음 화제로 되돌렸다.
“그래도 한번 가시지요. 소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혜민서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드나드는 곳인데 아무래도 불결하지 않은가? 없는 병도 생기겠다, 휘야.”
“백성과 우리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히려 혜민서에서 인정을 받았다 함은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혜민서에 가자고 잡아끄는 휘의 손에 마지못해 따라가며 임안군은 퉁명스럽게 휘의 뒤통수에 내뱉었다.
“속도 없는 놈.”
휘는 임안군에게 자신의 굳어진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못 듣지 않았다. 들었다. 주위에서 이들 형제를 두고 수군대는 말,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궁에서는 작은 소문도 순식간에 뜬구름 같은 소문으로 번져간다. 정체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도 없는 여인네들이 있는 궁이었다. 그네들의 입을 타고 떠도는 소문은 때론 헛웃음이 나오는 터무니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가끔 가슴을 후벼 파는 소문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끈 떨어진 갓 취급당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휘지만 임안군이 가끔 이렇게 속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조바심이 났다. 성질이 급하여 마음속의 말을 바로 툭 내뱉고 마는 임안군의 성정이 괜히 부왕의 진노를 사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 때문이었다. 형이었다. 어미가 죽고 세상에 둘도 없는 피붙이였다. 휘는 그런 형이 성마르게 길을 재촉해서 걷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