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나이도,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로 나와 유관하다
알폰소 링기스는 미국 철학자이자 작가 겸 번역가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겪은 다양한 체험들을 자신의 철학에 녹여 현상학의 독특한 갈래를 발전시켜왔다. 니체의 정언명령 개념,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 메를로퐁티의 육체 개념 등 “기존의 언어와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선배 학자들의 성과를 해체하고 변형하여 다르게 사고하고 표현하는 독특한 철학과 문체를 창도”함으로써 “사상 측면에서나 행동 측면에서 대학의 상아탑에 갇힌 보통의 포스트모던한 학문들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평을 받는다.
링기스는 우리 사회가 공통의 정치질서, 경제질서 등을 세우고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합리적 공동체’를 표방해왔다고 말한다. 개인들은 소통행위를 통해 언어, 역사, 지식 등에 통합되는데, 이때 개개인 고유의 개인성은 상실된다. 이런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자는 정신질환자, 위험인물, 야생인간 등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를 향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합리적 공동체는 고문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편입시키려 애쓰며, 여의치 않으면 격리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동안 합리적 공동체는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타자들을 색출하여 고문해왔다. 자기만의 철학 사상의 정수를 담아낸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에서는 합리주의의 폭력성에 희생되는 타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합리적 공동체’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아가 타자들이 죽음의 장벽을 가로질러 내미는 맨손을 잡아 ‘타자 공동체’와 ‘죽음 공동체’를 이룰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