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 시인의 시집 『눈과 도끼』가 시작시인선 0322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하였고 2001년 『현대시학』에 「옻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가 있으며, 문단으로부터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아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눈과 도끼』에서 시인은 명멸하며 향진하는 빛다발 속에서 돌연 하나의 색과 모습을 띠고 우연과 필연의 인과에 관여하는 ‘눈’을 ‘도끼’에 비유한다. 눈이라는 ‘미지의 도끼’로 폐허가 도사리고 있는 삶의 순간들을 찍는 행위는 곧 시인이 시적 순간을 포착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찍는 행위는 다의적 의미망을 형성하여 그 자체로 시적 사유의 장이 되며,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여정이 된다. 시인의 도끼날은 타인을 찍고 가족을 찍고 유년의 기억을 찍는다. 먼 길을 돌아 자신을 찍기에 이르면서 삶과 죽음, 불변과 이변, 고귀함과 비천함, 다정과 무정, 풍요와 빈곤 등 ‘모순’이 혼재된 삶의 진실을 빛나는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다. 그 중심에는 ‘고향’ ‘옛집’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수놓아져 있으며, 이미지들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인의 현존을 환원해 들이는 기제로 작용한다. 정병근 시에서 ‘옛집’ ‘어머니’ ‘고향’에 대한 이미지는 해설을 쓴 김진수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시인의 시적 자아가 배태된 자궁”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자신만의 기억술을 통해 복원함으로써 대상의 부재 안에서 존재를 현현顯現시키며, 존재에 대한 기억을 통해 부재를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시적 자아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의 시학’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