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또는 판타지 소설처럼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세계를 탐독하는 일은 지나가는 한 시절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성인이 한참 지난 나이에도 “메이플의 탈주 경로를 생각하”듯 현실의 일탈을 즐기는 ‘나’는 아마 “노인의 일원이 되”(「알공퀸 파크」)어서도 변함없는 삶을 살 것만 같다. 여기 서호준의 시집에는 그러한 세계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의 발화와 풍경이 곳곳에 그려져 있다. 이곳엔 갑주와 투구를 입고 해양 생물과 싸워야 하는 꿈의 세계가 있고(「커브 온 더 락」), 해리포터 게임 속 이벤트 스크립트를 통해 재탄생한 텍스트가 있으며(「환희의 곳간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캐릭터인 럭스의 빛나는 스킬과 스토리가 있고(「광휘의 특이점」), 말하는 것이 모두 이뤄지고 마는 늪에서 주문을 외우는 모험가의 세계(「고블린」)가 있다. 누군가는 리얼리티의 부족을 이야기하겠지만, 이세계(異世界)의 경험이 현실의 경험을 압도하는 이들에겐 과연 어느 쪽의 재현이 더욱 핍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