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고 난폭한 세계를 통과해 흘러가는 물송이들
어둠을 벌려 환한 길을 내는 달밤의 노래
시력 20년 차를 맞는 시인 신영배의 여섯번째 시집 『물안경 달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0년대 전위시의 지형도에서 진은영, 김이듬, 이기성 등과 함께 ‘마녀적 무의식의 시’(오형엽)로 읽혔던 신영배의 시. 그는 그간 ‘물과 그림자의 시인’이라 불리며 무정형의 존재들이 흐르고 투과하여 낯선 상상계로 향하는 과정을 시로 담아 김광협문학상과 김현문학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는 여성의 삶에 주목하여, 날카로운 폭력 현장을 부드럽고 환상적인 세계로 옮겨내는 부단한 실험을 감행하면서 현대 시사 안에서 자신만의 독보적 영역을 확보했다. 이번 시집에서 전 세대를 망라해 다양한 폭력을 겪는 익명의 여성들을 ‘B’로 부르며, 그녀들의 아픔이 연결되어 흐르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전반부 서른여덟 편의 시가 1, 2부에 나뉘어 담겨 ‘달리고 날고 돌고 흐르는 물송이’의 운동을 리듬감 있게 제시한다면, 3부의 긴 산문시 「달밤」에는 시 쓰는 삶의 면면이 담겼다. B와 나, 찢기고 뭉개진 얼굴들이 환한 물송이로 다시 피어날 환한 날을 향해 신영배는 오늘도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
신영배는 어둠 속의 사물을, 잃어버린 단어를, 상처 입은 마음을 한 송이 한 송이 물송이들로 피워내려 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찢기고 버려진 그녀들에게서, 굳게 닫힌 사물들에게서 가까스로 하나씩 물송이가 피어날 때, 우리는 어딘가 환한 세계로 옮겨지는 중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오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