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도교의 재초의례齋醮儀禮에 쓰이다가 문인들에게 수용되었고, 궁중으로까지 들어갔다는 것 외에 보허자의 본질과 확산 과정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나마 문헌에 약간씩의 단서들이 남아 있어 추적은 가능했다. 보허자에 올려 불린 악장으로서의 [벽연롱효사碧烟籠曉詞] 덕에 보허사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었고, 보허사 범주 안의 시작품들을 많이 남겨준 중국 시인들과 조선의 시인들 덕에 시문학으로서의 보허사 수용양상을 살필 수 있었다. 15세기 여민락과 16세기 여민락의 관계 및 15세기 낙양춘의 선율을 바탕으로 16세기 보허자에서 15세기 보허자의 선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한 보허자 곡의 연주로 추었다는 『악학궤범』의 기록 덕에 학무鶴舞도 복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중세왕조들의 궁중예술을 연구해오는 중인데, 고려·조선의 궁중예술들은 악곡·노래[시가/악장]·춤이 융합된 무대예술[정재呈才]이었다. 음악만으로, 춤만으로, 시가만으로는 그 미학의 진수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융합예술체들이다. 그래서 각 부분을 연구한 뒤 하나로 합치는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올려야 완성되는, 복잡하지만 즐거운 작업들을 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