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위한 빈자리

긍정넉넉
- 작성일
- 2018.5.24
대위의 딸
- 글쓴이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저
열린책들
나, 반지를 받겠어요. 지금 당신은 그리뇨프를 닮았어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눈빛이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기를 원하는 마리아랍니다. 그러니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너무 사랑하지는 마세요.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문학동네)」에서
이정희는 김해연에게 그가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뇨프와 푸가초프는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열린책들)』에 나오는 인물들인데 「밤은 노래한다」를 읽을 당시에는 이정희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고 대신 뿌쉬낀의 장편소설 『대위의 딸』을 읽어보겠노라 생각했을 뿐이다. 『대위의 딸』을 읽고서 위 문장을 다시 보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정희의 처연함이 느껴졌다. 이정희는 김해연이 푸가초프를 닮길 원했던 게 아니다. 그녀는 김해연에게 푸가초프의 삶을 선택한 스스로의 결심을 알렸던 것이다. 그녀가 김해연에게 원하는 모습을 말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푸가초프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 사람은 정희였다.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너무 사랑하지는 마세요’라고 속삭이는 이정희의 말을 손에 꼭 쥐면, 그 슬픔이 눈물처럼 흐를 것만 같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은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나서 구입했다.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했던 말만으로 『대위의 딸』이 연애 소설이며 대위의 딸을 사랑하는 인물은 당연히 ‘그리뇨프’일 거라고 짐작해버렸다. 소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은 소설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위의 딸과 그리뇨프 사이에서 꽃피운 사랑이 궁금한 게 아니라 사랑에 목숨을 건 ‘그리뇨프’의 반대쪽에 서 있는 인물인 ‘뿌가쵸프’가 궁금했다. 뿌가쵸프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위의 딸』은 ‘뾰뜨르 그리뇨프’라는 귀족의 자제가 군대에 들어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뿌가초프 반란군의 습격으로 벨로고르스끄 요새를 빼앗기자 오렌부르그로 가서 요새를 되찾을 길을 모색하다가 요새를 빠져나오지 못한 마리야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향하는 이야기가 큰 줄기다. 뿌가초프는 그리뇨프와 마리야의 사랑을 이뤄주는 매개체 역할로 등장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뿌쉬낀이 뿌가초프의 반란군 이야기를 위해 연애소설을 차용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뿌가초프 반란이 역사적으로 가진 의미에 비해 소설에 등장하는 뿌가초프는 음식의 풍미를 살리기 위한 양념처럼 재미를 위해 등장시킨 인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설정은 ‘반란의 주역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성을 뒤흔들어 놓은 당대 최고의 정치범을 안전하게 소설 속에 형상화시키기 위해 가정소설과 연애소설을 방패로 삼은 것(p.220)’이다.
뿌가초프 반란의 진압이 가지는 의미는 민중이 활발하게 일어서던 시대는 가고 참고 순종하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말한다. 대규모 농민, 농노의 반란으로 확장되었으나 끝내 괴멸되고 만 뿌가초프의 반란을 살펴보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무무」가 떠올랐다. 농노제의 폐해가 잘 나타난 소설이 바로 투르게네프의 「무무」이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민생단 사건’을,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선 ‘뿌가초프의 반란’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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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