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리뷰

hermes91
- 작성일
- 2018.6.10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글쓴이
- 헤르만 헤세 저
그책
1930년 그러니까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기 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발표됐다. 우리나라에는 그전에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도 발표가 되었다. 왠지 <지와 사랑>이란 제목은 일본식 번역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주인공들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개인적 성향이 각각 철학자, 지식인을 상징하는 지(智)와 예술가로서 에피쿠로스적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면 의역된 제목이 아주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중세의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시작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각각 성속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이라면 단연 전자는 그리스어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군다나 그들이 머무는 장소는 수도원이지 않은가. 당시 수도원 이상의 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성을 추구하는 아폴론을 닮은 나르치스와 달리 본질적으로 쾌락주의의 화신인 디오니소스 캐릭터인 골드문트는 촉망 받는 미래의 수도원장과 돌아온 탕아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기묘한 우정의 발현으로 표현된다.
소설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도입부에서 댄서이자 이교도였던 어머니의 대속을 위해 수도원으로 보내진 골드문트가 앞으로 벌일 유랑에 가까운 방황의 전조가 슬며시 제시된다. 이성의 화신 나르치스가 학업에 정진하고, 신에 대한 복종과 사랑이라는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고전적 과제와 씨름하는 동안 훗날 돌아온 탕자가 될 골드문트는 부단히 속세의 쾌락과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결국 리제라는 유부녀와의 관계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을 부르는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수도원을 떠나게 된다. 소설에서는 줄곧 이성과 감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소설의 초점은 나르치스에서 골드문트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개인적으로 수도원과 속세라는 공간의 이분법적 구성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성을 상징하는 수도원이 상대적으로 나르치스에게 보호와 안전을 제공했다면 골드문트에게는 인본주의적 해방을 의미했다. 그리고 나르치시는 이미 그전부터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적합한 영혼이 아니라는 점을 적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 않았던가. 자유로운 영혼에게 수도원이란 공간은 억압과 속박이지 않았을까. 하나의 공간이 서로 상이한 영혼에게 그렇게 다른 의미라는 점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개인에게도 이성과 감성이 공존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이야기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 골드문트에게 오롯하게 돌아간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수월했다. 유부녀 리제와의 관계를 통해 거듭나게 된 골드문트는 자신이 여성들에게 매력적인 존재라는 점을 간파했다. 골드문트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구원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팜므 파탈이었던 어머니라는 극복해야 할 존재이기도 했다. 골드문트가 체험하는 방랑은 필연적으로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다. 조각가로 변신한 그는 예술의 세계에서 구도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르치스가 학문에 대한 정진에서 자기 삶의 좌표를 정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성장소설의 궤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골드문트의 쾌락주의적 탐닉은 멈춰야 할 타이밍을 몰랐다. 그리고 한때 수도사 지망생이었던 그가 저질러서는 안되는 살인까지도 범하게 되지 않았던가. 중세를 초토화시킨 흑사병의 대유행 가운데, 골드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대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욕망이 추구하는 모든 지점들을 골드문트는 말 그대로 직접 체험한 것이다. 불교에도 심취했다는 헤세가 불가에서 말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문학을 통해 재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또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골드문트의 이런 방탕한 방랑은 일종의 시련으로도 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는 궁극적 구원(redemption)에 이르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구도의 길이 조용하고 엄숙한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한 연구와 대화일 수도 있겠지만(나르치스의 경우), 골드문트가 걷게 된 속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어쩌면 돌아온 탕자에게는 성(聖)보다는 속(俗)이 깨달음을 위한 장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의 온갖 풍파를 추체험한 돌아온 탕자 골드문트에게 그런 점에서 나르치스와의 재회는 필연적이며, 수도원으로의 회귀 역시 구원의 완성을 위한 통과의례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비극의 탄생>을 통해 그리스 신화야말로 모든 창조적 행위의 원형이라고 니체의 주장 대로 헤세 역시 비슷한 궤적을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이성을 대표하는 선수로 등장한 나르치스의 원형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자의식의 화신 나르시소스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신의 본성을 지속적으로 이성으로 제압해야 하는 그의 삶도 제 멋대로 산 골드문트의 그것만큼이나 고통과 번뇌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정상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는 삶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나라면 과연 나르치스의 선택을 했을 것인가? 아니면 골드문트의 길을 걸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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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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