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 사회 정치/자연과학/IT 모바일

지나고
- 작성일
- 2018.8.23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글쓴이
- 이라영 저
동녘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나의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p. 10 들어가는 말)
이 책의 제목을 왜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유는 더 있다. 이라영 작가 자신을 위한 제목이기도 하지만, 다른 여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과연 ‘진짜’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이러한 걱정 속에서 혹시 자신이 페미니즘에 민폐를 끼치거나 페미니즘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위축되는 여성들도 있다. 스스로 ‘완성형’ 페미니스트는 ‘이 구역의 보안관’이 되어 페미니즘을 걱정하면서 페미니스트 단속에 앞장선다. 가정을 지키려고 가족을 억압하듯이, 페미니즘을 걱정하느라 정작 삶을 외면한 검증이 난무한다. 페미니즘은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래야 한다’는 굴레가 무의미하지는 않으나, 페미니스트를 단속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하다. (p. 46)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구역의 보안관’에게도 외치는 제목 같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으니까 이제 그만 단속하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오세라비의『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를 읽었다. ‘진짜 페미니스트’와 ‘그 페미니즘’, ‘없다’와 ‘틀렸다’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라영은 오세라비가 틀렸다고 주장한 그 페미니즘에 쉽게 규정짓거나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발언을 뱉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을 교정하려 하기보다, 그러한 행동이 발생하도록 만든 감정의 맥락을 수용하는 것이 먼저다.(p. 7)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 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p. 67)
결국 이 책은 ‘진짜 페미니스트’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하자는 의도로 쓰여진 게 아닐까 싶다.
차별은 악의로 벌어진다기보다 무지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관계’를 성찰하고 이에 대해 질문하여 관계의 재구성, 곧 권력과 관념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통념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동물과 인간, 다른 성과의 관계,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 여성주의적 시각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p. 222)
조남주의『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도 느낀 점인데, 여성주의적 시각은 당연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든다. 이를테면 여자는 밤 늦게 다니면 안 된다는 게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 여자만 그래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당연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대를 해야 한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 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열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원히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 42)
참고로 오세라비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잘못된 길』을 종종 거론한다. 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며, 애초의 목적이었던 투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실제로 대부분 여성들의 관심사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책이다. 오세라비는 잘못된 길이기에 틀렸다며 가지 말라고 주장하지만, 이라영은 잘못된 길이라도 경험을 쌓으며 알아가라고 말한다. 선택은 자유다. 다만,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공격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미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에서도 참고한 문헌인데,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카롤린 엠케는『혐오사회』를 통해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증오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고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고 덧붙인다. 여러모로 연대가 필요한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좋아요
- 6
- 댓글
- 8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