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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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8.12.2
그리스인 이야기 3
- 글쓴이
- 시오노 나나미 저
살림출판사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3]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를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교과서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한 번쯤은 들어본 부분이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책의 초반부에 이 시기에 대한 그리스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시기와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상황에 대한 설명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에 대부분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게 느껴진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련된 책은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원정기](글항아리)를 읽었던 나의 입장에서는 내용이 다소 중첩된 느낌마저 받게 된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하여 처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 시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인 이야기] 시리즈의 2권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참패한 아테네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3권은 그러한 아테네의 힘겨운 상황을 이어서 설명한다. 민주정이 아닌 30인의 과두정이 성립되면서 민주정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혼란이 아테네를 더욱 힘겹게 만든다. 과두정 지지자인 크리티아스는 이전의 아테네에서 볼 수 없었던 숙청을 통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과두정 강화 및 친 스파르타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민주정과 과두정에 대한 시민의 선택이 아닌 공포 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으로 인하여 트라시블로스의 봉기로 인하여 스파르타로부터 외면당한 크리티아스의 과두정은 붕괴된다. 하지만 트라시블로스는 페리클레스처럼 정국을 운영할 그릇이 아니었기에 아테네의 암흑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한 스파르타는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 폐쇄적 입장을 고수하는 스파르타의 패권은 불안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파우사니우스와 감독관인 에로포스의 대립, 여기에 헬롯 출신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리산드로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스파르타 역시 내부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하여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는 물론 스파르타의 패권을 의심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스파르타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페르시아의 아타크세르크세스와 '황제에 의한 평화'라는 협정을 통하여 그리스 본토는 스파르타가, 소아시아 해안 일대의 인접한 섬들의 영유권은 페르시아가 갖는 것으로 공표하면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일단락 된다. 그러나, 이는 스파르타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페르시아와의 협정으로 인하여 테베를 비롯한 많은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의 무력 패권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테베는 원래 스파르타와 함게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일원이었지만, 민주정을 옹호하는 펠로피다스와 과두정을 옹호하던 에파미논다스가 서로 협력하여 테베의 안정과 군사 개혁으로 인하여 점점 강대해지면서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한다. 특히 300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테베의 '신성부대(Sacred band)'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중무장 보병을 단 700명만 보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쇠퇴한 상황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테베의 패권 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테베는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라는 두 명의 걸출한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정예부대인 '신성부대'의 규모가 300명이라는 점은 테베의 패권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몰락과 더불어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패권은 그리스의 암흑기를 예고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362년 테베를 질시한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병력 3만 3천(기병 3천 포함)의 테베 연합과 2만 2천(기병 2천 포함)의 반 테베 연합이 격돌한 만티네아 전투에서 테베가 전투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그리스 전체의 소모전으로 마무리된다. 테베는 이전에 사망한 펠로피다스와 더불어 페마니논다스가 전사함에 따라 급속도로 그 힘이 쇠약해진다. 훗날 테베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모든 시민들이 노예로 팔려가면서 완전히 소멸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의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국가가 바로 마케도니아였다.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이들은 그리스 민족이지만, 왕국이었기에 그리스에서 미개한 국가 취급을 받아 왔으며 심지어 그리스 모든 도시 국가의 제전인 올림픽에도 참가하지 못한 마케도니아였기에 이들의 대두는 눈여겨 볼만하다. 최근 [모차르트]라는 책을 읽으면서 모차르트의 성공이 그의 아버지의 기여분이 크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 시기의 마케도니아의 역사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미개한 마케도니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한때 왕자 시절에 테베에 인질로 머무르고 있던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암투를 통하여 왕위에 오른 이후에 몸소 개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된다.
먼저 테베에서 운용한 기병의 존재를 더욱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부의 테살리아 지방을 흡수하여 이 지방의 우수한 말을 확보하여 대규모의 기병을 편성하였으며, '팔랑크스'라 불리우는 중무장 보병을 조직하여 길이 7미터에 달하는 '사리사'라는 장창으로 무장시켜 그 유명한 밀집 장창 대형을 갖추게 된다. 또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정복을 통하여 획득한 땅을 농민에게 나눠주면서 자작농의 증가를 꾀하였으며 화폐의 주조와 광산의 개발을 통하여 경제 활성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필리포스 2세의 개혁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 연합을 격파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20대에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원정이 가능했음을 새로이 알게 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투에 연달아 승리하면서 동방을 호령하던 제국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의 죽음으로 인하며 몰락하게 되고, 히다스페스 전투에 승리하면서 인도에 다다른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이미 많은 책들이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러한 원정 막바지에 마케도니아 상층부 지휘관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불만과 함께 종군을 거부한 사건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이 원정은 페르시아를 정벌하는 것이었기에 이미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 이전에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기에 지휘관들은 회군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불만을 들어보면 당시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원정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패자인 페르시아인을 '지방장관'(비록 해정에만 국한되었지만)으로 임명하면서 우대한 것.
2. 페르시아인의 관습을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강요한 것
3. 페르시아풍 의복을 두르거나 옥과에 앉는 등 페르시아의 나약한 생활방식에 매료된 듯 보이는 것.
4. 이집트의 신탁을 통하여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실제로 믿고 있다는 의심.
5.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동방 원정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것.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불만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이건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이 비판을 받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개인적인 생각을 마치 실제 역사인 것처럼 반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그녀 개인의 생각임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마지막 전투인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의구심 역시 비판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왜 페르시아가 수사와 같이 방어력이 강한 도시에서 수성전을 하지 않고, 한 번의 회전을 통하여 승부를 지었는지 의문을 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도 페르시아의 병력 대부분이 국왕의 직속 군대가 아닌 지방 장관과 부족에서 차출한 병사들이기에 한 도시에서 장기간의 수성전을 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생각도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의견이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생각을 마치 역사인양 표하는 부분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이야기 3]은 여러모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분량의 한계가 아쉽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그리스 역사와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분량은 좀 아쉽긴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기에 그녀 역시 그렇게 판단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시리즈를 그녀의 대표작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와 연계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아테네가 과두정이냐 민주정이냐에 따른 갈등과 불안정한 패권으로 인하여 혼란의 시기를 보이는 상황에서 로마는 이것을 본받아서 '리키니우스 법'을 제정하면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최소화하면서 '레스 푸블리카'를 지향하였다는 언급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인 이야기] 시리즈는 정통 역사서는 아니다. 각종 사료와 분석에 기반한 것이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개인적인 생각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실제의 역사라는 점과 더불어 어렵지 않게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의 역사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이 필요성을 충분히 짐작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타
466쪽 아래에서 4번째 줄 : 사프라트 -> 사트라프
: 이 오타가 흥미로워서 언급해 본다. 고대 페르시아의 지방 행정장관 또는 태수를 뜻하는 용어 "사트라프"는 나 역시 읽으면서 헛갈렸다. 즉, "사트라프"와 "사프라트"로 잘못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후자가 발음하기 편하여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는데, 이 책 역시 막판 이 부분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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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