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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 광인의 수기
글쓴이
레프 톨스토이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9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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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2월 중순에 처음 읽었을 때, 죽어가며 아등바등 하는 중년남자 이반 일리치의 찌질함을 감히 비웃고 싶었다. 아무리 죽기 싫어도 그렇지 이렇게 비참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이었다. 한창 잘 나가던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죽음을 앞두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며 단순히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다.

 

 이번에 독서모임을 앞두고 다시 읽었다. 두 번째여서 그런지 소설이 여유있게 다가왔다. 특히 그의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부부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마치 영화를 두 번째 보면 처음 볼 때 안 보이던 미장센과 각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과 같다. 훤칠한 외모에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영화를 보듯 눈 앞에 훤히 그려진다. 그러고 보니 왜 이 작품을 아무도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적당히 넓고 고풍스럽게 장식된 집무실 책상 앞에서 최고급 양복을 입고 서류를 들춰보는 고등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사실 이반 일리치는 표면적으로는 행복해보이지만 내면세계는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남자다.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아내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들 부부는 화려한 사교생활에서는 죽이 잘 맞는 부부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혼 후 아이가 생길 무렵부터 소통이 단절된 채 살아왔다. 아내의 짜증과 잔소리가 거슬릴수록 그는 더욱 일과 승진에 매달렸다. 일과 책, 카드게임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은  피곤한 아내와의 대화를 피하는 좋은 구실이자 도피처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큰 집을 마련하고 새 가구들을 들여놓으며 장식하던 그는 사다리에 올라가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법을 가르쳐주려다 미끄러지면서 옆구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와 일치해 외적인 삶에 치우쳐 살아와 피폐해진 무의식의 정신이 좀 쉬어가라고 극단의 처방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당신의 내면세계를 돌보며 살라고 말이다.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는 힘들었다. 그의 외면 세계는 내면 세계와 너무 멀리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마흔다섯 살인 그는 지금 죽기 억울했다. 자기는 열심히 일했고, 유능했고, 잘 살아왔는데 그깟 옆구리 좀 부딪친 일로 시름시름 죽어가다니 말이 되는가! 최고의 의사들은 그에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죽을지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그의 병증에만 관심을 둘 뿐. 심지어 그의 아내도 환자인 자신의 고통과 거리를 두며 남들에게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는 양 생색만 내려한다. 성숙한 사람들은 알다시피 그런 그의 아내는 그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동안 그가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적대적으로 살아온 사실이 자신의 심혼인 아니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듯, 그의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니무스와 불통으로 견뎌온 시간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역할인 페르소나에 치우친 삶이 그의 아니마를 질식시켜 사망선고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거다.

 

  다행히 이반 일리치는 죽기 한 시간 전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의사가 가족들에게 그의 사망을 알리자 그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비록 외적으로는 화려하게 살아왔지만 영적으로는 진정한 자기 자신과 분리된 그의 삶은 죽음과 같다. 죽기 전의 그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거짓'을 떠올리며 그토록 괴로워한 이유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죽음의 끝이 되었다. 

 

  칼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청년기까지 사회와 자신의 직업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훌륭한 페르소나를 갖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중년부터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면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심혼인 아니마/아니무스와 접촉하며 살아야 건강하다고 한다. 융은 [인생의 전환기]에서 "죽음에의 저항은 불건강하고 이상한 것이며,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저항 때문에 인생의 후반기부터 그 목표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융은 종교가 중년의 학교라고 하며 "모든 종교가 초현세적인 목표를 걸고 있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며 중년의 필독서로 다가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삶과 부부 사이를 되돌아보고 개선점을 찾는다면 남은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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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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