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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tz2
- 작성일
- 2019.5.24
미투의 정치학
- 글쓴이
- 정희진,권김현영,루인,한채윤 공저
교양인
사람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모든 죽음이 애통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다른 죽음보다 더 슬픔의 크기가 컸다.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많은 집단이 이 죽음에 연루됐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 우리는 지난날로부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는가.
한 연예인의 죽음 이후로도 숱한 죽음이 발생했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숨이 끊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그런 죽음도 있었다.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끝끝내 알지 못했다.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 죽음이 발생한 까닭이다.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던 인물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던 이도 죽었다. 용기 내어 고백함으로써 더는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얼굴이 알려진 터라 다른 일을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검사라 할지라도 일은 발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어쩌면 이는 진실을 고백한 죗값을 치르라는 사회의 요구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묻고 싶다. 피해자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건에서 나는 권력의 불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해자는 적어도 피해자보다 강했다. 피해자의 지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자신이 지닌 힘을 업무를 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때 활용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데도 사용했다. 왜 싫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까,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면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굳이 이제 와서 당시의 일을 들먹이는 건 보복 아닌가요. 사람들은 물었다.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일 피해자가 피해자다웠다면, 그럼 가해자는 처벌받았을까. 이미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피해자에게 스스로가 피해자답게 행동했음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그 시점에서 어떻게 반응을 했건 간에, 사건은 발생했을 것이다. 아니, 적극적인 저항은 도리어 가해자의 공격성을 더욱 부추겨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다.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한낱 가정을 들먹이며 판단할 순 없으며 해서도 아니 된다.
위력. 미투 사건의 본질로 이 단어가 언급됐다. 위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 · 무형적인 힘을 말한다. 폭행 · 협박을 사용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수 있다. 형법상 업무방해죄(형법 제314조), 특수폭행죄(형법 제261조) 등에 있어서 범행의 수단으로 되어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내가 이해하기로 이는 폭력이었다. 지금의 미투 물결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었다. 피해자들이 비로소 말하기 시작해 표면으로 드러났지, 이전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위력은 종종 구사됐으리라. 가부장제가 보다 견고했던 시절에는 그것이 위력이라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여성은 사회에서 어떠한 지위도 가질 수 없었으므로 가해자가 제 신분과 지위를 활용해 폭력을 가할지라도 그러려니 여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비단 여성에게만 이 문제가 해당하느냐, 이는 또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여전히 엄격하다. 여성스러운 남성과 남성스러운 여성. 자신이 타고난 성과 자신이 지향하는 성에의 차이를 지닌 사람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차갑다. 그들이 남성/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경직돼 있다. 사회가 정한 기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그들은 비정상이다.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다른 처벌이 내려진다. 그들 역시도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프레임에 갇힌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므로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식의 해석 또한 유효하다.
춘향이 지키려 했던 건 정조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자신 또한 기생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춘향은 일종의 도박을 했다. 사회는 춘향의 시도를 정조를 지키기 위함이라 해석했지만, 춘향은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는 신분제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했다. 오로지 정조 개념으로만 접근했던 ‘춘향전’ 달리 읽기가, 과연 이와 같은 시선이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긴 할까. 폭력을 폭력이라 말할 수 있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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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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