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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phia
- 작성일
- 2019.12.6
뤼미에르 피플
- 글쓴이
- 장강명 저
한겨레출판
이것은 기록이다.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특정한 하나의 공간, 뤼미에르 빌딩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
실재인 듯 실재가 아닌 공간이 소설 속에 펼쳐진다. 뤼미에르 빌딩은 현실에 실재하는 건물이 아니다. 그러나 르.메이에르 빌딩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 두 건물을 연관지어 생각할 것이다. '뤼미에르란 르.메이에르에서 따왔겠군.' 하고, 어렵지 않게 깨달을 것이다.
소설집을 구성하는 세계는 총 세 개다. 실제의 신촌, 소설 안에 재구성된 신촌, 그리고 단편 <마법매미>에서 현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신촌. <마법매미>는 허구와 실제를 연결하는 중간 장치이자 또한 완벽한 허구다. 소설집 중간에 배치되어 앞과 뒤를 가름과 동시에 연결한다.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와 소설 속 세계를 모호하게 뒤섞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 표현된 신문 기사(혹은 집지 기사)적인 편집 장치도 흥미롭다. 죽은 작가의 인터뷰 내용은 크고 굵은 글씨로 배치돼 있다. 마치 실제 기사에서 강조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처럼.
여기서 오는 의문. 신문에 실린 인터뷰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한 인간의 일면만 부각시키고 그마저도 편집을 거친 뒤에 실리는 인터뷰.
아니, 애초에 인터뷰이는 자신을 얼마나 솔직하게 내비쳤을까? 정말 솔직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 사람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터뷰가 그 사람을 조명해 주는 하나의 선명한 렌즈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여기서 또다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인터뷰는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감추는 역할을 한다.
사실과 허구와 진실은 서로 애매하게 맞닿아 있다. 마치 뤼미에르 빌딩이 르.메이에르 빌딩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지만, <<뤼미에르 피플>>의 세계 속에는 르.메이에르 빌딩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뤼미에르 피플>>이 출간됨으로써 현실 속 르.메이에르 빌딩과 신촌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생겨났고, 이것이 또한 '신촌'이라는 지리(장소)에 작은 의미를 새로 부여하게 된 것처럼.
진실과 거짓뿐 아니라 존재와 부재도 얽히게 된다. 존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것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부재도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역설 속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연작소설은 자신이 신촌을 사랑한 흔적이라고 썼다. 그 말에 따르면 현실 속 신촌이든 소설 속 신촌이든 결국 사랑의 대상이 된다.
특정 장소를 자주 다니다 보면 그 땅과 알게 모르게 관계를 맺게 된다. 장소에 대한 애정(나아가 애증까지도)은 그 관계 속에서 싹트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실은 내가 신촌의 거리와 그 일대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시절 전부를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 공간을 나는 사랑한다. 자본의 흐름 속에서 이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미 내가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신촌의 모습은 과거로 박제됐다.
사실 공간에 대한 마음은 영원한 짝사랑이다. 애착을 갖는 건 인간일 뿐, 공간은 중립적으로 거기 서 있다.
"사람은 벽지 무늬나 하늘의 구름, 얼룩을 보고도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벽지나 구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122쪽. 804호 <마법매미> 중)
이 책의 마지막 소설, 810호인 <되살아나는 섬>은 공간에 대한 저자 특유의 관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섬(공간)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를 갖는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그 섬(공간)의 의지다. 죽음과 부재를 거쳐 다시 삶과 온전한 존재를 향해 간다. 섬의 무녀 새홀리기는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은 뒤에야 가장 '인간다운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녀로서는 죽었으나, 신적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새홀리기 당주는 옛 밤섬이 있던 자리에 순전히 노래의 힘으로 새 밤섬을 쌓아 올렸다. 새홀리기 당주가 토사와 갈풀, 버드나무로 만드는 섬은 매년 1,300평씩 면적이 늘어나 나중에는 폭파되기 전보다 더 커졌다. (308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그러므로 이것은 기록이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기록. 대척점에 있는 두 세계들(부와 가난, 성과 속, 인간과 비인간 등)이 실은 단단히 뒤엉켜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 주는 기록. 그렇기에 이해하기 까다롭고 어려운, 또한 온전하지 못해서 조금은 슬프기도 한 기록이다.
그녀의 슬픔은 영안실 한 곳 전체의 슬픔보다 컸다. (20쪽. 801호 <박쥐 인간> 중)
"나한테는 미래가 없어." 남자아이가 말했다.
"왜 네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는 거야?" 여자아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71쪽. 802호 <모기> 중)
"우린 이렇게 태어났어. 갈 곳이 없어. 인간들은 자기들 세상에 우리를 끼워주지 않아. 우리는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졸업장도 없어. 그리고 저 땅 아래 커다란 세계와 다른 동생들이 느끼는 것에 문자 그대로 묶여 있어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263쪽.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 중)
부족함이 많이 보이는, 존재이자 부재라서 반존재인 이들ㅡ뤼미에르 피플(사람들)을 연민하고 그들의 삶에 마음을 쓸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게 읽다 보니, 사랑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랑과 유사한 모습의 감정이 생겨 버렸다.
"책임감?"
ㅡ그녀가 내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껴. (96쪽. 803호 <명견 패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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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지 못했으나 남겨 두고 싶은 구절들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다음 단계, 다음 목표가 필요하다. 어디든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큰 틀에서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72쪽. 802호 <모기> 중)
뭐든지 흔해지면 값을 잃는다. 비둘기도 그렇다. 어릴 때에는 평화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날개 달린 쥐 취급을 받는다. (111쪽. 804호 <마법매미> 중)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뿐이리라. (113쪽. 804호 <마법매미> 중)
젊은 신학자들이 한창 해방신학에 심취해 있던 시대였다. 알빌은 한국인에 대해, 또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항상 묵직한 죄책감을 느꼈다. (312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핍박받으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내면에 놀라운 지혜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엘리트 수사가 갖고 있던 순진한 제3세계 민중상에도 동화처럼 잘 들어맞았다. (314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 수사가 새홀리기라는 인간을 정확히 보고 사랑했을까? 단순히 이미지를 보고 새홀리기에게 빠져버린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것이기는 할까?
이 남자는 의문이나 갈등을 마음에 담아두고 숨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외면할 수 없어 종교에 빠졌을 것이다. (319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어떤 사람도 결심만으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수사님은 서품을 받건 받지 않건 사제로 사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영혼을 사로잡는 듯한 열정이 진실해 보인다 해도, 결국 자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기존의 자신을 이루던 믿음을 다 부숴버리고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320-321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밤섬과 그 일대 행정동 하나 정도 넓이의 땅이 세상의 중심이고 만사의 기준인 새홀리기에게 가톨릭의 세계종교라는 개념은 흥미로웠다. (324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절대선이나 구원자 같은 게 있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보다는 체계는 없더라도 사람 사이의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게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중략)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선한 마음과 보편타당한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고민하지 말자. 가까이에 있는 우리 동네, 신촌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며 살자. 저는 그렇게 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저처럼 산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328-329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새로 태어나길 원한다면, 자기 파괴와 침잠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었다. (333쪽. 810호 <되살아나는 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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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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