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아그네스
- 작성일
- 2020.2.25
19호실로 가다
- 글쓴이
- 도리스 레싱 저
문예출판사
요즘 저자의 소설들을 찾아 읽고 있다.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편안함이다. 그건 주제나 소재가 편안해서가 아니라 인물 묘사가 자연스러운 데서 오는 편안함이다. 많은 남성 작가가 묘사하는 여성 인물들에겐 어딘가 찜찜한 구석과 의혹이 남는데 반해 여성 작가가 묘사하는 여성과 남성 인물에는 그러한 의혹이 남지 않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어 좋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를 비롯해 196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쓰여진 11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최종 후보 명단에서 하나 빼기]
다소 재미있는 제목의 이 단편은 유명한 여성을 상대로 모험심이 발동해 한번 쓰러뜨려보려는 욕망을 품고 접근하는 그레이엄 스펜스와 그의 잠자리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바라라 콜스의 밀당 이야기다. 재작년 미투운동이 한창일 때 딸아이의 선생님 한 분이 "너희는 나중에 남자가 사주는 술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그 남자들이 왜 너희한테 술을 사주겠니?"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갈 데까지 가게 된 바라라 콜스가 취하는 차선책은 아마도 경험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대처법이 아닐까 한다. 여성을 대하는 많은 남성들의 머릿속에 '그것'밖에 없다는 건 참으로 슬픈 가부장제의 현실이다.
[옥상 위의 여자]
"자기를 지켜보는 세 남자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 때문에 세 사람 모두 화가 났다."
아파트 옥상에서 수영복 팬티 차림으로 선탠을 하던 여자는 건너편 옥상에서 일하는 세 남자에게 발견된 후 자신의 선탠을 계속하기 위해 '나쁜 년'이 된다. 그 후 연령대가 다른 세 남자가 보여주는 반응은 각기 다르다. 10대 소년 톰은 낭만적 환상에 빠져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아마도 20대인 스탠리는 길길이 날뛰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발광하고, 가장 나이 많은 아버지뻘인 해리는 그냥 내버려두자고 한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반라의 여성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통해 조마조마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으며 성폭행 당하고 살해되는가.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자신의 인생에서 귀한 10년을 가져간 두 남자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여성이 고통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꺼낸 이야기다. '그 세월 동안 내내 사랑하며 두근거리던 물건'을 막상 꺼내보니 당혹스럽고 보기 흉했는데 손에서 떨어지지 않아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만난 미친 여성에게 동정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품자 심장이 어느 순간 떨어져나가며 홀가분해진다. 오로지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슬픔과 고통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사라지는 건 마음의 진실이다. 지금 너무 괴롭고 슬프다면 타인의 삶에 등 돌리고 내 안에 갇혀 지내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두 도공]
작가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꿈꾸는 사람과 꿈꾸지 않는 사람." 나 역시 꿈꾸는 사람이고 한발 더 나아가 융심리학을 통해 꿈해석과 상징에 관심이 많기에 이 작품이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의 지인인 현실 속의 도공 메리 토니시와 작가의 꿈속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늙은 도공의 이야기를 통해 꿈과 현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꿈에 나오는 늙은 도공은 창작자인 작가의 창조적인 아니무스 상인 듯하다. 황무지에서 도기를 만드는 늙은 도공은 태초에 진흙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피조물을 창조한 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신으로 상징되는 창조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와 남자 사이]
한 대학교수의 아내와 정부로 지낸 두 여성 페기와 모건이 만나 술을 마시며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여성연대 이야기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끼리의 단결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 깨진다'는 속담이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에는 여성의 단결과 목소리를 가로막는 남성 중심 사회의 두려움이 들어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 분열돼 왔던 여성들, 엄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이와 올케가 연대할 때 달라지는 건 이 세상이 좀더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거다.
[19호실로 가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이 단편을 다 읽고 맨 앞으로 돌아와 다시 읽어보니 이러한 첫 문단으로 시작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현모양처를 이상향으로 꿈꾸며 결혼생활을 시작할까. 그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결혼생활과 양육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회의하며 발버둥치는가. 바로 나의 이야기이고 지인의 이야기라고 느끼며 공감한 이야기다. 결혼 생활 10여 년이 흐른 뒤 작고 더러운 호텔방을 찾아가며 자신을 찾으려 애쓰던 수전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해야겠지만 가장 바라지 않던 결말 앞에서 슬픔이 넘친다. 가정에 종속된 여성의 삶과 이성중심 사회에 울리는 경고의 종소리 같다.
여성 작가의 인물 묘사가 편안한데다 익숙한 소재라고 해서 편하게 읽으면 자칫 작가의 문제의식을 놓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편안해보이는 여성의 일상 속에 스며있는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위험과 공포, 길을 가다가도 낯선 남성의 이상한 눈빛을 마주치고 불현듯 느끼는 위기 의식이 그렇듯이 말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통해 만나는 페미니즘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이러한 질문을 마주하게 한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