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2020

이야기
- 작성일
- 2020.3.8
방구석 미술관
- 글쓴이
- 조원재 저
블랙피쉬
예술은 어렵다. 그 중에서도 미술은 더 어렵다. 표현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추상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등 무슨 무슨 주의의 작품하면 구분도 안되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알고자 전문서적을 뒤져보면 볼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방구석 미술관>은 좀 다르다. 이 책 한 권으로 지금껏 모르던 미술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선 다른 책들과 다르게 힘을 빼고 "너도 알 수 있어"라고 말하듯 친질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도통 알 수 없이 유명하다니 유명한 줄 아는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 시작부터 면박주지 않고 잘난척하지 않고 다정하게 들려준다. 읽다보면 화가의 인간적인 면에 우리와 동질감도 느끼고, 작품에 대해서도 '아! 그래서 이런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화가에 대한 이해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 가슴에 울림을 준다. <방구석 미술관>은 제목 그대로 격식 차리지 않고 방구석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화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미를 느끼며 그들의 작품을 마음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한 뭉크에 대해 읽고 나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절규>라는 작품에서 비극적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도 되지만, 생을 알기도 전에 죽음을 먼저 접하고 평생을 죽음과 함께 했던 뭉크가 당시의 평균수명보다 30년이나 더 산 것을 알게 되면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절규>가 희극적으로 보이게도 된다.
프리다 칼로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50쪽)라 말하는 프리다에 대해 몸이 많이 아팠고 화가인 남편은 바람둥이었고 정도만 알고 있었다. 소아마비로 6세에 성장이 멈춘 오른발, 18세의 교통사고로 척추지지대를 착용해야 했으며 두 차례나 유산을 해야 했고 죽기 전까지 허리 수술을 7차례나 받고, 오른다리는 괴저로 잘라내야 하는 육체적 고통도 모자라 22살이나 나이가 많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편력은 프리다 칼로의 동생과도 바람을 피워 정신적 고통까지 안겨 준다. 정말 저자의 말대로 고통의 여왕답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그린 그림은 자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보기가 고통스러워 힘이 들었다. 1926년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라는 작품이 나는 제일 좋다.
에드가 드가
무희의 화가라 불리는 드가. 당시의 발레리나는 무대에 서기 위해 지독한 경쟁을 하고 무대 밖에서는 스폰서에게 몸을 팔아야 했다고 한다. 드가는 평생을 독신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며 부르주아 남성에게 상처받는 하류층 여성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드가의 그림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프리다 칼로처럼 고통이 담겨있다. 다른 점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하층민 여성의 고통, 타인의 고통을 담았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마음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빈센트 반 고흐
저자가 '전 세계가 사랑한 영혼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렇다. 저자의 말대로 나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사랑한다. 잘은 몰라도 유명한 몇 점은 고흐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은 영혼의 화가라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녹색 요정이라는 압생트에 영혼을 빼앗겼다고 표현한다. 압생트의 주원료인 향쑥의 주성분인 산토닌의 부작용은 황시증으로 세상을 노랗게 보이게 한다. 알코올 중독을 걱정하는 의사에게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87쪽)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자신의 귀를 자르는 지경이 된다. "반 고흐식 후기인상주의는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색을 향한 100도씨의 열정.' 인상주의가 찰나의 빛이 보여주는 찰나의 색을 포착하려고 했다면, 반 고흐는 그 색이 어디까지 순수하게 정제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색을 통해 '자연의 생기'와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94쪽)
구스타프 클림트
우리가 익히 아는 그림 <키스>의 화가다. "뭉크로부터 시작된 표현주의는 기득권을 쥔 보수적인 화단에서 분리를 선언하며, '새 시대, 새 예술'을 꿈꾼 독일의 전위적 예술가들에게 전격수용됩니다. 그런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맞는 표현주의를 담대하게 시작한 화가가 바로 클림트입니다."(119쪽) 저자는 클림트를 가리켜 희대의 반항아라고 말한다. 가난했던 클림트는 빈 미술공예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동생 에른스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창업해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친동생 에른스트와 아버지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자 예술가 컴퍼니마저 폐업한다. 절망을 딛고 일어난 클림트는 빈 미술을 좌지우지한 빈 미술가협회에 대항에 분리주의 그룹을 만들어 자신의 철학과 개성을 담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사회적 금기나 규율에 갇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예술로 표현한 클림트의 곡선, 황금빛 장식성은 당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반영한 결과로 여성의 관능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에곤 실레
실레의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성병인 매독을 앓았고 이는 어머니 마리까지 감염되어 아이가 사산되고 실레 세 살 때는 누나 엘비라가 선천성 매독으로 열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매독 증세가 심해진 아돌프 실레는 직장도 잃고 고통 속에 살다가 실레 15세 때 사망한다. 그런 아버지를 실레는 정말 사랑했다고 한다. 실레는 "죽음을 부르는 '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 실레는 인한 고통과 불안을 자신만의 예술을 꽃 피우는 영감의 원천으로 승화"(125쪽) 시켰다. 17세에 당시 45세였던 클림트를 만난 에곤 실레는 미술에 대한 철학과 기법에 영향을 받는다. 1909년 19살 빈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한 실레는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한다. "실레는 자기 예술의 시작을 '자기자신'에서 찾는다. 내면에서 꿈틀대는 불안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자기 확신과 열정을 유일한 무기로 예술혼을 불태운다."(130쪽) 벗어날 수 없는 성욕의 굴레, 주체할 수 없이 타오르는 자기애, 이 젊음의 열기를 숨김없이, 꾸밈없이 선으로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것이 19금 포르노그래피로 보이는 실레의 드로잉에 숨겨진 정신이다.(142~143쪽)
폴 고갱
진보주의 정치부 기자였던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은 조국 프랑스의 첫 대통령이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당선되자 한 살의 고갱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아내의 고향 페루로 향한다. 신문사를 차리는 꿈을 가지고 페루로 향하던 클로비스 고갱은 배 안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고갱은 페루에서 6년 동안 생활한다. 페루 소년 고갱은 친할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6살 프랑스로 돌아온다. 남미의 뜨거운 태양, 자연과 숨 쉬던 고개은 대도시 파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10대의 고갱은 선원이 되어 자유를 누리다가 5년 후 어머니의 사망으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증권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결혼도 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일에 능력을 보이던 증권맨 고갱은 회사를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미술을 시작한지 7~8년 되는 때 인상주의전에 작품 전시를 하게 된다. 프랑스에 경기 불황이 닥치고 증권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고갱은 33세 늦은 나이에 전업화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고 5프랑을 벌기 위해 벽보 붙이는 일까지 하게 되지만 그림은 포기하지 않는다. 원시와 야생이라는 콘셉트를 찾은 고갱은 자기만의 색채로 자신이 느낀 바를 자유롭게 표현한다. 그림은 그려도 팔리지 않고 아내에게는 욕만 먹던 고갱은 예술 인생을 건 최후의 승부수로 원시와 야생이 살아있는 타히티로 향한다. 타히티에서도 1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파리로 보내지만 이해도 받지 못하고 팔리지도 않는다. 죽기 3년 전부터 조금씩 팔리게 되지만 매독에 시달리며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고통에 시달리는 삶을 살다 1903년 죽음을 맞이한다.
에두아르 마네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아 그림에 숨겨둔 남자.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던 미술을 붓으로 내리쳐 금을 냈고, 전혀 새로운 모더니즘 미술로 가는 문을 찾았습니다."(174쪽) 마네는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높이 치켜세운 화가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시장, 아버지는 판사인 귀족 집안의 자제였다. 마네는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을 고수하는 살롱전 입상 화가 밑에서 고전적인 미술을 배웠고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며 연구하고 스무 살에는 미술 여행을 했다. 게다가 심사위원이 역사화, 신화화, 종교화 등 교육적 주제를 담은 작품을 선호하는 살롱전 신봉자였다. 그런데 마네는 현대의 생활, 즉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리라고 주장하는 샤를 보들레르를 존경하며 사상적 스승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의 소개로 일본화인 우키요에를 접하게 된 마네는 충격을 받게 된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전에 출품한다.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에서 영감을 받아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파리스 심판>을 재해석한 이 작품은 그림 속 인물이 모두 1860년대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새오가 매제가 될 사람이었고, 누드 여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모델이었다. 마네로부터 미술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게 된다. 1865년 마네는 매춘부의 매춘 현장을 포착한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출품한다. 이 그림은 완전 평면으로 절대 진리인 원근법을 폐기 처분한다. '그림이 그려지는 곳은 평면이다.'라는 마네의 생각은 이후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등 모든 모더니즘 회화의 기본 정신이 된다. 1882년 그린 <플리베르제르 바>에서는 복수 시점을 사용한다. 근대 미술의 토양을 다진 화가이다.
클로드 모네
18세기 장 자크 루소로 대표되는 게몽주으 사상이 탄생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정신으로 압축되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다. 19세기에는 '답은 오직 단 하나'라는 획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정신이 탄생하는 가운데 근대적 정신이 반영된 모더니즘 미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다. 또한 카메라의 등장은 회화에 위기 의식을 갖게 했지만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게 한다. 1858년 작 <루엘 풍경>은 모네가 18세에 그린 그림으로 스승 부댕에게 하늘 묘사의 왕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22세 용킨트를 만난 모네는 '주관적 감성을 담을 풍경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드가, 르누아르, 세잔, 바지유, 팡탱 라트르 등이 속한 마네의 집에서 미술에 대한 토론을 나눈 바티뉼 그룹의 멤버가 된 모네는 마네가 알려준 평평하게 그리고 디테일을 버리고 원색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만의 차별점으로 빛을 캔버스에 담는다. 드디어 제1회 협동협회전에 <인상, 해돋이> 1872를 내놓는다. '오직 빛이 보여주는 세상을 솔직하게 포착해 그린다'는 인상주의를 시작한다.
폴 세잔
20세기 회화의 씨앗으로 소개되는 세잔은 모네의 바통을 이어받아 세잔식 인상주의를 만든다. 미술계가 인상주의 매너리즘에 빠지자 쇠라, 고갱,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그리고 세잔으로부터 후기인상주의가 시작된다. 법을 공부하던 세잔은 22살 화가가 되기 위해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서 파리로 상경한다. 누군가의 도움없이 대가의 그림만을 교본으로 삼아 독학으로 그림 그리기를 10년을 한 세잔은 마네의 <올랭피아> 도전장을 내밀 듯 1865년 <모던 올랭피아>를 내놓는다. 카미유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욱 된 세잔은 야외로 나가 자연과 빛을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게 된다. 1877년 38세에 파리를 떠나 1906년 사망하던 때까지 홀로 '세잔식 인상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자연을 탐구하며 그림을 그린다.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다"고 한 세잔은 사물이 지닌 본연의 색과 형태, 그 본질을 추출해 그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인상주의에 조화와 균형을 담고자 했다.
파블로 피카소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대가들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시작했을 것 같지만 이 책 <방구석 미술관>을 읽어보면 그런 화가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뒤늦게 시작을 했다. 야수주의의 앙리 마티스도 22세에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상경한다. 파블로 피카소를 이야기하면서 앙리 마티스는 왜 나왔을까.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치열하게 의식했다고 한다. 파리로 온지 14년 째인 1905년 33세의 마티스는 자기 부인을 모델로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을 공개한다. 어느 비평가각 '야수'을 그려놓았다고 비웃은 것이 야수주의 명칭의 기원이 된다. 이 작품으로 마티스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도자'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어릴적부터 미술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은 피카소는 23세, 1904년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다. 1906년 마티스와 피카소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마티스는 열두 살 어린 피카소를 관대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1907년 앙리 마티스는 <푸른 누드>를, 피카소는 입체주의 시작을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을 내놓는다. 마티스는 세잔과 원시미술에 심취해있었고 그것을 곁에서 알고 있었던 피카소는 마티스의 연구과제를 빼앗아 '세잔과 원시'를 극단까지 끌고 간 것이다. 마티스의 <푸른 누드>는 두 개의 시점을 사용하지만 피카소는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이것으로 '아방가르드 선도자'란 타이틀은 피카소의 것이 되고 만다.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라고 피카소는 말하며 말년에는 세잔이 사랑한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성에 살며 "세잔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기까지 한다. 회화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전통적 고정관념을 버린 피카소는 회화를 실험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형태에 집중한다. 피카소가 형태에 집중할 때 마티스는 색에 집중한다. 마티스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자살충동까지 느꼈지만 고통을 견디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영감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의 화실을 주제로 <분홍화실>, <붉은화실>, <화가의 가족>, 그리고 <가지가 있는 실내>를 그린다. 형태를 단순화시킨 '구성물'로 화면을 '구성'한다. '분석적 입체주의'로 사물의 형태를 무한대로 쪼개나가던 피카소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그 때 마티스의 <가지가 있는 실내>를 보고 돌파구를 찾는다. 피카소의 <기타>는 잘게 쪼개기를 버리고 크게 쪼개 구성하고 있다. 또한 신문지, 악보, 벽지, 종이 등을 오려 붙이는 파피에 콜레를 선보인다. 마티스는 피카소를 '노상강도'라 칭하며 멀리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둘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마르크 샤갈
이름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착각하기 쉬운 샤갈의 본내 이름은 모이세 하츠켈레프로 러시아 유대인 격리지구 게토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다. 게토의 유대인은 거주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고 유대인 학교에서 수준 낮은 교육을 받아야 했고 취업과 직업 제한, 토지 소유 금지로 소규모 행상, 상업, 수공업에 국한된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파괴, 학살이란 뜻의 포그롬까지 자행되었다고 한다. 포그롬의 발단은 1881년 술 취한 러시아인이 유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쫓겨나가 러시아인들이 집단으로 유대인 거주지 게토로 쳐들어가 파괴, 학살, 강간을 저질렀다. 포그롬은 20세기 초까지 벌어졌고 유대인 대부분은 감수해야 했다.
샤갈은 19세에 화가가 되겠다며 당시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허가증도 가지지 않은 채 궁핍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샤갈은 유대인 변호사 골드베르크를 만나게 되고 골드베르크는 샤갈을 하인으로 등록해 체류허가를 받도록 한다. 샤갈은 왕실협회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고전적 수업 방식에 회의를 갖고 자퇴를 한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즈반체바 학교에 입학한다. 1년정도 즈반체바를 다닌 샤갈은 1910년 8월 23세에 파리로 간다. 이 때 '큰 걸음'이라는 뜻의 '마르크 샤갈'로 개명을 한다.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의 화가 모네, 반 고흐, 마티스 등의 그림을 직접 보게 된다. 특히 피카소가 주도한 입체주의는 샤갈의 양식을 완전히 바꾸는 게기가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에 빠져든 샤갈은 캔버스에 빛을 창조한다. 렘브란트는 어둠과 밝음의 대비로 빛을 만들었다면 샤갈은 다채로운 색채로 빛을 만들어낸다. 1911년 <나와 마을>이라는 자신을 대표할 걸적을 내놓는다. 1914년 여름, 27세에 누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비테프스크로 향한 샤갈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8년동안 머므르게 된다. 이 때 연인 벨라와의 사랑을 담은 걸작들을 그린다. 그리고 고향 마을에 유대인을 그린 '비테프스크 연작'을 내놓는다. 러시아 정부가 유대인어인 이디시어 출판을 금지시키자 차별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유대인 화가' 샤갈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17년 11월 레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 당이 정권교체를 실현하고 개역을 단행한다. 개혁안에는 유대인 차별 폐지가 포함되어 있다. 샤갈은 비테프스크 예술 인민위원으로 러시아 혁명 1주년 기념거리 장식을 감독하고 정부에서 작품을 대량 구입하기도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 갈등이 심해지고 예술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국가는 러시아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절대주의 선구자 말레비치를 밀어주게 된다. 조국에서 작품을 팔 길이 없어진 샤갈은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다른 것과 차이를 존중할 수 있다면, 혁명은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조국을 떠나 파리로 간다. 1923년 36세의 샤갈을 파리는 환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시기를 가장 행복했다고 샤갈은 말한다. 194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한 샤갈은 고향 비스테프스크가 독일군에게 파괴되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샤갈은 자신의 뿌리를 그리는 것, 자신의 고통을 그리는 것, 불합리를 밝히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1930년 43세 <구약성경> 삽화작업을 시작한다. 69세 마르크 샤갈을 105점의 동판화가 담긴 <구약성경>을 출판한다. 그리고 인생 최후의 걸작, 12점의 <성서 이야기> 시리즈를 10년 동안 매달려 79세에 완성한다. 1973년 7월 7일, 프랑스 니스. 86세 샤갈의 이름을 건 미술관을 개관한다. 그곳을 주인공은 12점의 <성서 이야기>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추상미술의 창조자 칸딘스키를 저자는 최강 연애 찌질이라고 말한다. 1866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음악과 미술을 사랑했지만 26세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며 법률 고시를 가볍게 패스한 칸딘스키는 사촌 안냐 치미아킨과 결혼하다. 1896년 30세,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자을 본 칸딘스키는 충격을 받는다. 1896년 도르파르트 대학 법학과 교수직으 거절하고 뮌헨으로 간다. 안톤 아츠베, 폰 슈투크 등 스승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칸딘스키는 1901년 35세 팔랑크스 전시협회를 만들어 전시회를 연다.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했지만 그 해 겨울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만든다. 1902년 초 가브리엘레 뮌터가 입학을 하고 칸딘스키와 만나게 된다. 칸딘스키는 안냐와 별거를 하고 뮌터와 열애를 시작한다. 1909년 뮌헨 남부 무르나우에 칸딘스키와 뮌터는 정착을 한다. 칸딘스키의 추상회회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1911면 12월 뮌터,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알프레드 쿠빈과 함께 '청기사'를 만들고 자신들의 철학을 담은 <청기사> 연감을 출간한다. 1911년 칸딘스키는 아내 안냐와 이혼을 하지만 뮌터와 결혼을 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식은 것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러시아로 떠난다. 1년이 지나서야 나타난 칸딘스키는 1916년 3월 뮌터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러시아로 돌아가 연락을 끊는다. 뮌터는 40통의 편지를 보낸다. 1년 후 51세의 칸딘스키는 27세나 어린 모스크바 장군의 딸 니나 안드레브스키와 결혼을 한다. 1922년 칸딘스키는 뮌터에게 갑작스런 연락을 취한다. 무르나우 집에 있는 자신의 물건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대리인을 통해 한 것이다. 뮌터와 칸딘스키의 다툼을 4년이나 계속되지만 뮌터가 칸딘스키의 물건을 보내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67세의 칸딘스키는 뮌터와 함께 했던 때가 생애 최고의 시기였다고 고백한다. 50세의 뮌터는 남은 생을 함께 할 요하네스 아이히너를 만나 1931년 무르나우 집으로 돌아간다. 제2차 세게대전 중 나치는 청기사파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해 불살하버린다. 뮌터는 지하실에 작품을 숨기고 책장으로 입구를 막아버린다. 1957년 80세, 거장이 된 뮌터는 칸딘스키의 작품이 포함된 100여 점의 청기사파 작품을 기증한다.
마르셀 뒤샹
<방구석 미술관>의 마지막 주자는 현대미술을 낳은 혁명적 창조자 뒤샹이다. 친할아버지 에밀 니콜은 사업가로 성공한 후 예술가로 전향을 한다. 뒤샹의 큰형 가스통은 법대를 갔다가 예술가의 길을, 둘째 형 레이몽은 의대를 갔다가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 뒤샹은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1904년 17세 뒤샹은 풍자만화가로 활동을 하고 있는 첫째 형 가스통이 있는 파리로 간다. 그리고 20세부터 3년 동안 풍자만화가로 활동을 한다. 1910년 화단을 휩쓴 입체주의 그림을 뒤샹도 그리기 시작한다. 1912년, 샬롱 데 쟁데팡당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II>를 출품한다. 살롱 데 쟁데팡당은 1884년 보수적, 아카데믹한 살롱전에 대항한 젊은 예술가들이 독자적으로 연 전시를 시작으로 한 새롭고 진보적인 예술을 추구하며 심사도 없고 상도 없는 제도를 자랑하는 전시였다. 그런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II>를 거부한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에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넣은 것으로 수차례 실험끝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이유는 기존의 입체주의자들이 불쾌감을 느낀 것인데 제목에서 내려오는을 빼면 전시를 허락하겠다며 뒤샹을 압박하지만 뒤샹은 제목을 바꾸지 않고 작품을 가져와버린다. 이 사건으로 뒤샹은 기존 미술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안티 미술'을 시작한다. 뒤샹은 1년만에 자신만의 미술 콘셉트를 정립한다. '생각하는 미술', 즉 개념미술의 탄생이다. 1913년 <자전거 바퀴>는 뒤샹이 심심풀이삼아 만든 작품이다. 관객은 이 물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무의미의 미술'이라는 식으로. 1915년 뒤샹은 레디메이드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미 만들어진 것(Ready-made)으로써 예술가가 만들지 않고 '선택해' 예술이 된 미술품을 의미한다. 1915년 뒤샹은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간다.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거부당했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II>가 1년 후 1913년 뉴욕 국제현대미술전 <아모리 쇼>에서 주목을 받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후 2년 동안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담은 작품활동은 그리 주목을 끌지 못한다. 1917년 1월 독립미술가협회의 디렉터로 임명된 뒤샹은 전시 개막 전 <눈 먼 사람>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그리고 소변기를 사와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으로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에 출품한다. 6달러만 내면 어떤 예술가든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는 독립미술가협회전에서 <샘>은 협회 회장에 의해 전시를 거절당한다. 뒤샹은 항의의 뜻으로 사퇴를 하고 <샘>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눈 먼 사람> 2호에 뒤샹은 익명의 사설을 남긴다. '미술계는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 후 <샘>으로 대표되는 레디메이드 개념이 뉴욕 미술계에 뿌리내리게 된다. 뒤샹은 1923년 미술계의 비난을 받으며 체스에 올인한다. 1933년 체스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듣고서 1934년 다시 미술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고 놀 듯이 자기만의 예술을 만들어 갔다.
<방구석 미술관>에 나오는 이 14명의 거장들은 대부분이 모두 고통받는 인생 속에서 작품을 빚어내었다. 그들의 고통에 괴로운 마음이 들 정도 였다. 저자의 유머로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지만 화가들이 겪는 고통은 재밌게만 읽게 되지는 않았고 힘 빼고 쓰여진 책이지만 가볍지 않은 책이었다.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예술가의 삶을 인간적으로 느끼게 된 책읽기였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