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리뷰

달빛망아지
- 작성일
- 2020.4.23
버마 시절
- 글쓴이
- 조지 오웰 저
열린책들
조지 오웰의 두번째 발표작인 이 소설은 이전작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과 비교했을 때 인물, 사건, 배경 모든 면에 있어 허구의 성격이 보다 짙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역시 오웰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과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 주제는 바로 "제국주의의 허상"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이 아직은 이 책 하나뿐인데 '조지 오웰의 정치의식과 인간관'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영남대학교 박경서 교수의 노고가 담긴 귀중한 결과물이기에 30년째 중학영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판매량이 걱정되는 이 작품을 혼신을 다해 번역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웰은 1946년에 쓴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나는 결말이 불행하고, 세부묘사와 빼어난 비유가 그득하고, 부분적으로는 소리 때문에 선택한 단어들로 만든 미사여구도 아낌없이 들어간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이 소설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기에 몹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손에서 태어난 자연주의 소설이라니.
또, 주요배경이 정글숲이 우거진, 아열대의 낭만이 살아있을 미지의 세계 '버마'라니.
오웰은 또 그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냈을까?
내용은 어둡더라도 곳곳에 냉소적인 유머도 적당히 깔려 있을 것이고 경치 묘사 하나는 끝내주겠지?
뭐 이런 예상들을 했던 것 같다.
총평부터 말하면 이야기만 두고 봤을 때, 이 소설이 어째서 번역판이 하나뿐인지 알 것 같았다. (응?)
<동물농장>처럼 이런 저런 시대적 배경을 따지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후루룩 읽어낼 수 있다거나 각 캐릭터들에 대해 연민,증오,애정 등과 같은 평범한 감정을 이입하거나 해서 단순히 재미로 읽을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나처럼 오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일반독자들은 굳이 이 소설을 찾아 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자취를 좇는 과정에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그 사실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버마라는 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기에 후반에 배치된 작품해설을 먼저 읽었는데 그것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물과 그들 각각의 행동, 그리고 사건 하나 하나에 의미를 찾으며 집중할 수 있었달까.
처음에는 남자주인공인 플로리가 오웰이 제국경찰 시절의 본인 모습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닌가 했지만 (일부 녹아 있기도 하겠지만) 최종적으로 드는 생각은 플로리 자체가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대상을 은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야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기에 취향,지성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에서 몇 안되는 유럽인, 게다가 버마에서는 쉬이 마주치기도 힘든 '백인여자'라는 이유로 플로리가 아내로 맞으려 무던히도 애썼던 엘리자베스라는 인물도 있다. 그녀에게서는 상황에 따라 자기 잇속만을 챙기며 처신을 달리하는 모습에서 모양새야 어떻든 정신승리를 통해서라도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려 드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또한 플로리의 정부인 버마 여인 '마 흘라 메이'는 결과적으로 플로리를 죽음으로 내모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지만 그의 사후 매음굴에서 일하며 한 때 유럽인의 정부였던 시절, 동족을 하인으로 부리며 안락한 생활에 빠져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버마인이면서도 버마인을 폄하하는 의사 베라스와미와 결은 다르지만 개인적 영달을 위해 기꺼이 매국의 길을 택하는 부류와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플로리의 죽음은 '제국주의'라는 정치 사상의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 역자는 미국의 문학 비평가 '어빙 하우'라는 사람의 말을 빌어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하는 주인공 플로리의 죽음이 '개인의 이상이 정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절되고 그 결과 개인이 소외되고 희생되는 모습을 주로 다룬다'는 측면에서 전형적인 정치소설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최종 정리는 고세훈 고려대교수가 쓴 <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라는 책의 2장에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나와 있기에 함께 읽으면 좀 더 명료해질 것 같지만 이 책에 실린 박경서 교수의 맺음말 중에서 간결하게 정리된 것이 있기에 옮기며 이만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결론적으로 <버마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 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예쁜 표지. 버마가 아시아 국가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위치가 어디인지 몰랐는데 중국 아래쪽 국경과 맞닿아 있었고 인도와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소설에서 계속 버마를 두고 인도정부를 언급해서 완전히 붙어 있나 생각했었는데 정작 지도에서 찾아보니 인도와 버마 사이에는 방글라데시가 떡하니 끼어있어 붙어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이 책의 해설에는 1886년 1월 1일부로 영국이 하나의 나라였던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다고 나와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에서 지칭하는 '버마'는 국가명이 아닌 지역명이었던 것이다.(오! 놀라워!)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버마시절>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그 때는 제국주의고 뭐고를 떠나 오웰이 말한대로 지극히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소설'로 읽어보고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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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