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1. 책을 읽다! - 문학

이미지

도서명 표기
죄와 벌 (상)
글쓴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9.1 (169)
지나고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 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 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p. 11)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청년이『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음······ 그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다. 다만 겁이 나서 사람들은 모든 일을 망치는 것이다······. 이건 명제와 다름없지.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자신의 새로운 말, 이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너무 중얼대는구나. 이렇게 말만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거야.「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 일도 못하니까 지껄이기만 하는 거다.」이렇게 지껄이는 버릇이 생긴 것은 최근 한 달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누워서······ 있을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걸까? 정말 난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진정 그 일은 진지한 것일까? 전혀 진지한 일이 아니다. 이건 망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장난이다!〉     (p. 12)

끝까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지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죄와 벌 (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벌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고는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죄를 짓게 된 것일까.(p.98) 어쩌면 죄는 ‘그 일’을 저지르기 전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참고로 청자 ‘존경하는 선생’은 라스꼴리니꼬프다. 
 
「존경하는 선생.」그는 득의만면해서 말문을 열었다.「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 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친애하는 선생, 한 달 전쯤에 레베쟈뜨니코프 씨가 제 아내를 때렸습니다. 제 아내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한 가지 선생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냥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선생은 네바 강 건초용 짐배에서 밤을 지내 보신 적이 있습니까? 」     (p. 25)

라스꼴리니꼬프는 짐배에서 밤을 지내 본 적은 없지만, 가난을 넘어 극빈을 경험한다.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극빈이었을 것이다. 다소 설명적이기는 하지만, 주제와 맞닿는 얘기를 늘어놓던 마르멜라도프는 죽어서도 의미를 남긴다. 이번에는 말이 아니다. 죽음 그 자체로 파고든다. 

「죽을 때만이라도 편안하게 죽게 해줘요!」그녀는 구경꾼들에게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무슨 구경거리라도 났어! 담배까지 입에 물고! 콜록콜록콜록! 모자까지 쓰고 들어오지 그래······! 아이고, 정말 모자까지 쓴 사람도 있군······. 나가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켜 줘요!」
그녀는 기침 때문에 숨이 막혔지만 그녀가 윽박지르자, 사람들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분명 사람들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입자들은 이상하고 은밀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한두 명씩 문 쪽으로 물러났다. 이 만족감은, 친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다고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으레 마음속에 품게 되는 감정이며, 아무리 진실한 슬픔과 동정심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누구나 예외 없이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이었다.     (p. 261~ 262) 

누구나 예외 없이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이지만, 차마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혹 나만 그런 게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는 막심 고리끼의 표현처럼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인 것 같다. 언뜻 천사의 모습도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접하면 접할수록 매력적이다.『죄와 벌 (상)』은 낯선 사내가 야릇한 어조로 대답하면서 끝난다. 이름은 전혀 낯설지 않기에 그의 방문이 더 기이하기만 하다. 어서『죄와 벌 (하)』를 만나야겠다.


좋아요
댓글
4
작성일
2023.04.26

댓글 4

  1. 대표사진

    모모

    작성일
    2020. 4. 29.

  2. 대표사진

    지나고

    작성일
    2020. 4. 29.

    @모모

  3. 대표사진

    flattop

    작성일
    2020. 4. 29.

  4. 대표사진

    지나고

    작성일
    2020. 5. 1.

    @flattop

지나고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3.15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3.15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5.3.12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3.12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5.3.8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3.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05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8
    좋아요
    댓글
    64
    작성일
    2025.5.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22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