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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 작성일
- 20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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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델핀 베르톨롱 저
문학동네

때로는 이 끔찍한 사건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져, 혹시 내가 R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해. 아니면 내가 그날 까만 볼보에 치였던 건 아닌지. 또는 내가 죽어서 완전히 뻣뻣한 시체가 되어, 끝없이 황량한 대로 같은 영원의 길 문턱에서,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실어오는 우박을 얻어맞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R는 사실 현실에는 없는 존재이고, 못되게 굴던 나를 벌하기 위해 찾아온 악마는 아닌지. 이런 상상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포로로 잡혀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훨씬 논리적으로 보여. p.103
그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소나기가 퍼붓던 날이었다. 마디손은 전날부터 엄마에게 골이 난 상태라 아침에 학교에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마디손이 짝사랑하는 테니스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수업을 갑자기 취소했는데, 연락을 받은 엄마가 자신에게 전화도 바꿔주지 않고 수업 취소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까만 볼보가 멀찍이 뒤에서 오다가 속도를 줄인다. 남자는 자신의 고양이가 아프다며, 동물병원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말한다.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고, 동물 병원에 들렀다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남자의 말에 아무 의심 없이 마디손은 그 차에 올라 탄다.
그리고 마디손은 열한 살부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그 남자의 집 지하창고에 갇혀서 지내게 된다. 3평이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오 년이나 되는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마디손이 지하창고에서 써 내려가는 일기를 중심으로 사라진 딸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편지, 그리고 마디손이 짝사랑하는 테니스 선생님의 일상이 교차로 진행되고 있다. 마디손은 학교를 일 년 일찍 들어간데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아주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날이었으니, 정신적으로 성숙한 나이가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납치범에게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고 머리를 쓰고, 그에 맞서기도 한다. 글 쓰는 법을 잊어버릴 까봐 겁이 나 일기를 쓰기 위해 그에게 공책 한 권을 얻어 낸다. 그리고 날짜를 세기 위해 벽에 줄을 그어 체크하고, 남자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서 그가 왜 자신을 납치한 것인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아 내려 애쓴다.

<노인과 바다>에 내가 언제나 두 번씩 다시 읽는 구절이 있어.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죽이게끔 되어 있어. 고기잡이는 나를 살아가게 해주면서도 죽이는 일이기도 하잖아.' 노인은 생각했다. '아냐, 날 살아가게 해주는 것은 그애야. 스스로를 너무 속여선 안 되지.' 그는 생각했다." 나는 소년이 산티아고 노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R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봐. 나는 그가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일까, 처음에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지금 그가 날 죽이는 중이라서, 그래서 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봐. p.162~163
이 작품은 1998년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타샤 캄푸슈의 실종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08년이고, 그 후 2010년에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나타샤 캄푸슈가 <3096일>이라는 제목으로 유괴, 감금사건에 대한 자전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실제 사건은 오스트리아에서 열 살 소녀가 등굣길에 납치되어, 8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소녀가 유괴된 날부터 자유를 되찾기까지 걸린 악몽 같던 시간이 바로 3096일이었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을 만큼, 이 사건은 전세계를 경악시킨 납치극이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랑스 작가 델핀 베르톨롱은 열한 살에 납치된 마디손이 오 년 후 극적으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소녀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린 소녀인 피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어, 잔인하고 끔찍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려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실제 그녀는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벗어나 가족들 곁에서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것은 평생 그녀를 따라 다닐 테니 말이다. 한 소녀의 불안과 공포, 자유를 향한 끝없는 갈망 등의 감정은 결코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끔찍한 시간 속에서 한 순간도 그곳을 탈출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소녀의 희망을 향한 의지가 눈이 부셨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언제나 허구를 그것을 넘어 선다. 대부분의 범죄 소설에서는 가해자의 시점 혹은 가해자의 사정과 환경이 서사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범죄자에게 부여된 서사가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의 정황과 사건 이후 다시 살아가야 할 피해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작품처럼 말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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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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