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오우아
- 작성일
- 2021.1.6
죽은 시인의 사회
- 글쓴이
- N.H클라인바움 저/한은주 역
서교출판사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N.H.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삶을 독특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특하다는 것은 평소에 한 번도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독특함으로부터 어떤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는 결코 독특함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N.H.클라인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을 만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카르페 디엠”을 거침없이 외치면서 예전에 없던 수업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을 즐겨라.”는 말이 너무나 유명해졌습니다.
학교 공부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고 제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공부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학교에서 연례행사로 치르는 시험을 보기 위해 아들은 공부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쨍한 마음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험 점수가 상위권이길 바랍니다. 점수는 아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주사위 같습니다. 만약에 점수가 기대 이하로 나오면 저는 분명 어른답게(?) 잔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에게 오늘을 즐겨라, 고 한다면 아마도 공부가 아닌 딴 짓을 하게 되겠지요.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보고 싶은 영상을 볼 것입니다. 공부에 별다른 재미가 없는 아들이라 교과서가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현재의 즐거움을 대신할 것입니다. 아들에게 입시는 지옥이요, 게임은 천국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서로 달라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멈추지 않는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모순을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 아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공부만 하면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들은 가르치는 내용을 정신없이 노트에 적습니다. 내용이 중요하고 시험에 나올 것 같으면 별도로 표시하고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합니다. 이런 제도권 교육에서 학생은 시험밖에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하는 자기 주도 학습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현재를 즐길 수 있을까요? 섣불리 그랬다가는 학교에서 문제아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퇴학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독특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독특하게 살아야만 오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독특하게 사는 충분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존 키팅은 국어 선생님입니다. 그가 시를 가르치는 방식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의 주제, 내용, 소재를 주입식으로 하는 수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왜 시를 공부해야만 하며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시를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인즉, 시는 삶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되돌아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가 있어야 합니다. 시는 한 사람의 고백이며 사랑입니다. 시는 고난의 바다를 헤쳐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고 있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훼방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오늘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냅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셰익스피어, 월트 휘트먼 같은 위대한 시인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그들을 죽은 시인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의 감수성을 가지고 별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대한 시인의 시 속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는 영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행복, 아름다움, 진리, 정의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시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위대한 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를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살면서 부대끼는 고통 받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시를 읽거나 써보게 되면 시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자음과 모음으로 말을 만드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문학의 특별한 장르이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공식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지만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말은 아주 일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어떠한 공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당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마음의 편지를 쓰는 방법에 있어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키팅 선생님에 따르면 시는 언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영화, 사진은 물론 음식을 차리는 방법에도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면 하늘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웃음이나 눈물에도 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모든 것에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농담 삼아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할 때 키팅 선생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수학은 시와 성격이 너무 다른 공부이다 보니 수학이 시라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제껏 수학이 시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우리의 정답에서 벗어나 수학에도 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의 우아함 때문입니다. 수학의 우아함을 달리 수학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었던 지긋지긋한 경험을 떠올리면 수학이 아름답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저절로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데 수학 앞에서는 망설이게 됩니다. 계산만 하는 수학을 보고 있으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학의 우아함은 역설적으로 수학 문제를 눈으로 푸는 것은 아니라 마음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마음의 방정식은 숫자 너머의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숫자로 사람을 계산합니다. 이 소설을 보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5달러 95센트”라고 부르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시험점수가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없는 아들의 몸값을 계산해보니 겨우 5달러 95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듣고 보면 아들에게 공부할 용기를 일으키는 최고의 독설 같습니다.
이러한 괴민은 인생의 절반을 넘어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몸값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값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하지만 몸값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최고일까요? 독특한 것도 아니며, 아무런 우아함도 없는 몸값. 그러니 오늘을 독특하게 즐겨야 합니다. 삶을 몸값으로 계산하지 마세요.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지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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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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