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듬을 타고

달꾸러미
- 작성일
- 2021.2.28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나비꽃 에디션)
- 글쓴이
- 박우란 저
유노라이프
소리로만 들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보통명사가 있습니다. 마지막 만남이 있고 20여 년이 다 되어도 그렇습니다. 비록 그림처럼 형상화할 수 없는 글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창조성과 개성이 넘치는 문구는 아니지만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낯설지 않은 문구로 모녀 사이의 관계를 가정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래된 마음의 정리로 출발과 마무리 삼기에 좋아 보입니다. 천륜이라는 아주 오래된 관계어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실타래처럼 엮어가며 풀어가는 애도가 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마음과 기억이라는 것이 요상하다는 것을 요즘보다 더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물은 시간 앞에서 작아진다고 하는데, 요놈들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온 시간이 싸이고 싸이면서 갈수록 반대편 시간을 잡아먹는데도 엄마와의 모든 기억들은 ‘고마움’, ‘미안함’ 더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눈을 감았는데도 3차원 홀로그램이 되어 더 잘 보이는 ‘그리움’에 자리를 양보하기도 합니다.
무의식 속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있는 감정 덩어리는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결핍과 좌절, 외로움과 원망 등으로 응어리진 감정 덩어리는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그때에 그대로 멈추어 있으면서 현재의 나를 압도하고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지요. 이 아우성을 아무리 반복해도 끝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 그 요구를 정확하게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딸의 입장에서 엄마를, 엄마의 입장에서 딸을, 치사랑과 내리사랑의 쌍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감정의 골짜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딸, 두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엄마의 목소리가 다양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의 원초적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받은 경험의 기억은 30이 넘어서도, 60이 넘어서도 감정과 해석이 덕지덕지 붙은 무의식으로 변하여서 현실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미안함, 억울함, 고마움 등의 다양한 감정 10여 년의 수도 생활과 실제 상담 치료 경험이 만들어낸 아주 독특한 시각으로 가족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물결을 일게 합니다. 그렇게 출렁이고 굴러가며 만들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엄마와 ‘사회적 역할’로서의 엄마를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 속의 사회적 존재로써 내 안의 본성과 이성에 충실하게 가정을 넘어서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게 합니다.
좋은 엄마는 없습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분명히 축복이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능동적 동지애’를 원하는 육아라는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모습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모녀지간에도 아주 긍정적으로 사랑만을 담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인간의 관점, 사회적 관점이라는 이중적 관점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악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고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에 최적으로 순응한 엄마는 특히 그렇습니다. 아들에게는 온갖 정성으로 한낮 뙤약볕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딸에게만은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많은 양보를 권유합니다. 아들보다는 딸을 길게 늘어난 그림자처럼 자신의 연장선상의 존재로 여기는 장면을 목격하는 아들은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어찌보면 엄마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욕망에 집중하여 발화하고, 딸을 위한 변화보다는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아이의 욕망과 부모의 욕망이 부딪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무능하거나 감정적으로 동지애가 부족한 아빠라도 끼어 있는 상황의 경우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희생은 더 큰 변수가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엄마도 원초적으로 현실의 길흉화복에서 희로애락에 철저하게 반응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념무상의 절대적인 이상적인 엄마이기보다는 자신만의 길이 있는 현실의 엄마만 있을 뿐입니다, 절대적 가난에서 상대적 가난으로 시대가 달라졌고 맥락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아이대로의 길이 있듯이 엄마에게는 엄마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했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
그래도 엄마는 위대합니다. 엄마로서의 고유함은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모성이라는 것과 엄마를 찾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엄마가 조건 없이 아이를 향한 사랑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사회의 관행이, 세상의 질서가 만든 환상이고 신화일지도 모릅니다. 아동학대가 벌어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묵도하는 요즘 세태에서는 더욱 희생한 만큼의 보상 싹수가 보여야 정성과 사랑의 빛을 쪼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모성 본능에 제모습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감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능을 세상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메시지를 선택적이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타협점에서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와 욕망, 결핍과 상처를 애도하여 뜨거운 모성을 보여 줍니다. 초등학교도 못 다녔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온갖 고생으로 허덕이었지만, 극한의 굴레를 당신 대에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습니다. 내 안의 상처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자신을 깊이 알아 가는 존재만이 생각이 실천할 수 있는 숭고한 작업이라는 도착점을 보게 됩니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의심하고 질문하고 살펴야만 교활한 무의식에 굴복하지 않고 아이에게 손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내리사랑의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
엄마의 태도가 아이의 삶을 만듭니다. 엄마를 인생에서 맨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의식이 완숙하지 않은 시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고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엄마가 없는 경우에는 엄마를 찾아서 온 동네를 떠돌아다닐 정도입니다. 휑함의 허전함과 심지어는 두려움이 급격하게 몰려올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포함해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미지의 공간에서 마르지 않을 최소한의 생존 비법의 밑바닥을 만들 수 있게 해 줍니다. 엄마는 사회화된 지식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선택하여 말하고, 자녀는 그런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나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타인을 타인으로 보고 나를 나로 지킬 수 있는 삶을 꾸려가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체화하게 됩니다. 모성애와 자신의 결핍 사이의 피 튀기는 골짜기가 한쪽으로 기울수록 아이를 향한 대리 충족의 공간으로 간절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 어떤 감정, 어떤 상상을 하든 그것만으로는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보장받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상을 꿈꿀 수 있게도 합니다.
나를 자세히 보면 엄마가 보입니다. 비록 성(姓)은 달라도 엄마의 욕망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대물림되어서 나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매일매일 에너지를 쏟습니다. 가족, 모녀의 천륜이라는 핏줄 연대는 딸에게, 딸의 딸에게로 시간의 매듭을 넘어서 멈추지 않고 질기게 심리적 반복의 끈으로 이어집니다. 엄마와 딸이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두 존재가 태생적으로 만나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결핍과 욕구는 애증을 넘어서 서로의 행복을 담보하는 공생관계로 연결됩니다. 자연인과 사회인의 관계가 이익 균형으로 취사 선택의 경우보다 조화롭게 되는 경우에는 서로의 원초적 욕구가 서로 합일될 수 있는 지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엄마의 말과 엄마의 감정을 통해서 아이의 무의식이 구조화되고, 그 위로 의식이 생기어서 질서가 부여되면서 다양한 감정이 움튼 세계관이 올라서게 됩니다. 엄마의 존재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됩니다. 특히 객지 생활을 하거나 출산 직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실의 고통에서 밀려오는 무기력과 우울감으로 엄마의 세계로 침전하고, 심지어는 엄마의 자궁을 그리기도 합니다. 마음 속에 만들어진 엄마의 자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하는 마음의 근육이 되어 더 힘을 내기도 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상황으로의 집중보다는 안으로 안으로만 자신의 역할과 이미지라는 초점을 찾아 쪼그라드는 자신감에 배가 되는 에너지 불을 댕기게 합니다. 세상의 상처를 이겨내고 타인에 대한 믿음의 밑바탕이 되는 정서적 맷집으로 이르는 길에는 아이와 소통으로 아이의 관심에 감각을 키우고 나 자신과 아이에게 무수히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
나도 사랑스러운 딸이고 싶었습니다. 엄친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 위로와 응원이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는 감정을 전혀 동고동락하지 못 했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옛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습니다. 철이 지난 사랑은 이미 엄청나게 엇갈려서 구멍 난 가슴을 메꾸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물리적으로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에 박복함은 어렸을 때 바라보던 엄마의 나이가 되어 보니, 엄마 모습을 찾아갈수록 기억을 강해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 문명의 이기가 넘쳐나더라도 삶의 본질을 충족하는 일상의 매 순간에 엄마의 감성 자극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성을 자극하는 무의식적인 감성에 따라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오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기보다는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은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는가를 쉼 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합니다. 내리사랑을 향한 현장에서는 치사랑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보다 더 행복하면 괜한 죄책감이, 기대만큼 행복하지 못하면 미안함이 내 안의 엄마의 유령과 잘 동거할 수 있는 온전한 나 자신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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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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