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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1.3.5
영원에 관한 증명
- 글쓴이
- 이와이 게이야 저
클
사람은 누구나 진선미에 매료된다. 마치 해바라기가 양광에 이끌리듯, 인간 역시 진선미의 아우라에 매료되는 천성이 있다. 진선미의 세계에 미친 장삼이사의 이야기에 언제나 깊은 감명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촛불처럼 제 영혼을 다 불살라 재가 되도록 진리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의 세계에 헌신했던 천재들의 투혼과 비운은 매번 내 심금을 울린다. 종교인의 경우라면 헤르만 헤세의 소설『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떠오르고, 예술가의 경우라면 이외수의 『들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수학자의 경우라면 어떨까. 이와이 게이야의 소설『영원에 관한 증명』(클, 2021)을 꼽을 수 있겠다. 콜라츠 추측의 증명 노트를 남기고 요절한 천재 수학자 미쓰야 료지의 열정과 고뇌, 성공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다. 일본 소설이지만 한국에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아, 이 소설엔 여러 수학 이론들이 향신료처럼 등장한다. 가령 콜라츠 추측, 문샤인 추측, 가케야 추측, 리만 가설, 위상 수학, 군론과 수론, 이와사와 이론, 프랙털 이론, 끈이론, 초끈 이론 등이다.
천재는 적절한 광기와 적당한 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너무 앞서 나가면 학계 동료의 지지나 대중의 공감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안전한 울타리에서도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천재의 일상적 작업이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될 때, 그 순간부터 천재가 지닌 재능과 열정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되어 추락과 몰락을 예고하게 된다. 창작이나 증명의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술이나 약물 등 다른 뭔가에 의존하는 경우 천재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수학이라는 불타오르는 배에 우리는 함께 타고 있다. 배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내리길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불꽃이 강해질수록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젊은 재능이라는 연료를 소비하며 배는 끝없이 나아간다."(133쪽)
수학의 세계를 걸어가려면 도반이 필요하다. 료지에게는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준 은사 고누마 교수와 대학 동기인 구마자와와 사나가 그런 도반이었다. 료지, 구마자와, 사나 모두 교와 대학의 특별 추천생인데, 이들의 첫 협업이라 할 수 있는 게 '일반화된 문샤인'을 다룬 논문이었다. 군론의 기념비적 논문이기에 논문의 주저자인 료지는 '21세기의 갈루아'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료지의 도반들은 오직 수학의 세계에만 전념하는 '생활백치' 료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런데 이런 울타리가 순식간에 와해되자 료지의 몰락도 시작된다. 료지가 구마자와에게 건넨 말들 가운데 이런 말들이 있다. 수학올림피아드 일본 대표 출신인 구마자와의 자존심을 구기고 열등감을 부추키지만, 한편 새로운 목표를 향해 분투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나는 옛날부터 시험이 싫었어. 시험 문제에는 정답이 있잖아. 정답이 있다는 건 이미 누군가가 풀었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이 해결한 문제를 내가 왜 풀어야 하나 늘 생각했어."(65쪽)
"지금은 풀 수 없어도 죽기 전까지 계속 도전하면 돼. 내가 풀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풀어도 괜찮아. 그러니까 애초에 문제 때문에 좌절하지는 않아."(225쪽)
자그마한 학술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울타리의 와해는 료지의 수학적 천재성, 이른바 '수각(數覺)'이란 자극에 따른 동료들의 세속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선망과 질투, 분투가 뒤엉킨 복합 반응 말이다. 고누마 교수는 탐구에 전념하기 위해 국립수리과학연구소로 이직하고, 사나는 공학부로, 구마자와는 미국 연구원으로 떠나게 된다. 고누마 후임으로 온 히라가 교수는 증명 과정의 옮음을 직관적 해법보다 훨씬 중시하는 인물이기에, 3차원의 가케야 추측을 다룬 료지의 논문에 구멍이 있다는 뼈아픈 지적을 하고 당장 수정할 것을 지시한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증명을 제시한 자만이 해결자로서 인정을 받는다. 즉, 증명에 조금이라도 구멍이 있으면 해결자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 구멍을 수정해 완전한 증명을 만들어내야 해결자가 될 수 있어."(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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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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