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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작성일
- 2021.3.16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 글쓴이
- 스미노 요루 저
소미미디어
2017년이다. 담임을 맡았던 반의 남자애 하나가 이 책을 몇 달째 품고 다니는 걸 본 건. 남다른 가정사 속에 살면서도 구김살 적고 경우 잘 챙기면서도 자기 인생이 분명 자기 것이면서 본인 책임 아래 있다는 걸 잘 아는 훌륭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또래 남자애들보다 정신연령이 좀 높아서 철딱서니들의 몰이해를 받았지만 그따위 것들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문학 시간에 근대의 작품들을 배우더니 문득 이상이 좋아졌다며 그의 시를 필사하던 괴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기에 무슨 책을 읽는지도 관심이 갔는데 하필, 이런 무슨 네크로필리아같은 제목이냐.
표지의 벚꽃. 등을 돌린 남학생과 여학생. 흐드러지는 벚꽃. 내용이야 아련한 첫사랑을 다룬 청춘물로 추정이 된다면 그것과 어디 매치가 되는 제목인가. 그당시 나는 방탄소년단은 이름 땜에 더 크지 못할 거란 꼰대같은 선입견을 마구 휘두르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에, 역시 이 소설도 방구석에 숨어 킥킥거리는 덕후같은 녀석이 쓴 매니악한 소설이 아닐까 하고 경계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4년이 지났다. 올초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너무 재미나게 읽고 나니 일본 소설을 몇 권 골라 읽어볼까 했다. 학교 도서관 서가 사이를 눈으로 훑으며 지나는데 문학 서가에서 도통 발견하기 힘든 이 어휘가 눈에 걸리지 않을리가. 방구석 워리어든 친구 사이를 주름잡는 핵인싸든 인생에 한 번쯤은 반드시 거치고 지나갈 사랑의 열병처럼.
췌장암으로 곧 죽을 텐데도 밝고 명랑한 모습을 유지하는 사쿠라.(이름도 벚꽃이다. 사쿠라가 가짜, 사기꾼 같은 뜻의 은어로도 쓰이는데, 역시 소설에나 등장할 만한 설정이다. 췌장암 말기 환자가 이렇게 겉으로 멀쩡하게, 게다가 '밝고 명랑하고 '예쁘'다'니.) 친구고 뭐고 그냥 '나'로만 살아가는 '나'와 엮이면서 빚어내는 생의 마지막 찬란한 순간. 사랑을 통한 인간의 극적인 변화-물론 마지막 순간에야 그것이 그것이었음을 깨닫지만 인생이란 늘 그런 것 아닌가-를 오래간만에 이렇게 진지하고 풋풋하게 만났다. 뭐 매일매일 풋풋한 젊음들과 함께 지내지만 여고니까 이런 로맨스를 본 건 4년 전이 마지막이니까. 요즘 코로나 때문에 친구 관계의 폭도 깊이도 무척 좁아지고 얕아진 것들이 보인다. 인간 관계라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인간이란 게 좀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게 마련인데 그런 기회들을 얼마나 갖고들 사는지 모르겠다. 특히나 무뚝뚝하고 친구들이랑 만나봐야 PC방이나 스마트폰 게임 속에 갇혀 사는 남자녀석들은 더욱. 게임하는 게 좀 질리거든 이 책을 읽고 혹시나 주변에 '공병문고'를 쓰고 있는 예쁜 여학생이 없는지 좀 찾아다녀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덮어쓰고 있는 껍질을 깨 보라고. 그러면 그 전의 너와 그 후의 너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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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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