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서재(수리중)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1.3.23
정원의 쓸모
- 글쓴이
- 수 스튜어트 스미스 저
윌북(willbook)
흙 속에 저 정원 속에
<정원의 쓸모>를 읽고
봄이 오면 시골집 마당과 텃밭에서 그의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식물들을 깨우기라도 하는 듯 흙을 일구고 봄을 맞을 채비를 하는 까닭이다. 그는 바로 이 정원의 소유자이자 으뜸 정원사인 장인 어르신이다. 십 년 전 정년퇴직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그를 결사코 만류하던 장모님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은 환상의 콤비가 되어 두사람의 정원을 가꿔나가고 있다. 나 또한 아이와 함께 시골집을 찾을 때면 마당은 자연을 품은 놀이터가, 텃밭은 자연을 체험하는 현장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삼시 세끼를 텃밭에서 바로 수확한 식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되니 이 모든 게 정원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요즘 서점에는 식물이나 가드닝(정원가꾸기) 관한 책들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반려식물을 통한 위로와 자연이 가진 치유력에 대한 사람들의 높아지는 관심을 반영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에 본능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식물과 흙에 끌리는 걸까?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빈약한 나로서는 식물과 정원가꾸기에 관한 책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그 시선을 거두어 우리에게 정원이 왜 필요한지, 나아가 그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정원의 쓸모>이다.
우리는 복잡한 생각없이 이런(정원) 일에 힘을 쏟을 수 있다. 그것은 성장을 돕는 파괴이기 때문이다. 정원에 나가 한참 동안 일을 하다 보면 녹초가 될 수 있지만, 내면은 기이하게 새로워진다. 식물이 아니라 마치 나 자신을 돌본 듯 정화한 느낌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이 원예 카타르시스다.(20쪽)
처음 책제목과 책표지를 봤을 때 여타의 책들처럼 식물과 정원가꾸기에 대한 지식 및 정보를 전달해주는 책 정도로 여겨졌다. 이내 저자의 흙 묻은 손을 잡고 책 속에 펼쳐진 정원들을 눈으로 밟으며 걷노보면, 정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과 궁금증을 품게 된다. <정원의 쓸모>는 저자인 수 스튜어트 스미스의 할아버지가 1차 대전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와 어떻게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첫 삽을 뜬다. 이어서 저자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땅을 파고 잡초를 뽑는 활동을 통해 상실에 대처했던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았고, 정원 디자이너인 남편을 만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정원을 만들고 가꾸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평소 우리는 식물을 돌보고 정원을 가꾼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우리의 감정을 돌보고 마음을 가꿔주는 건 아닐까 하고 저자는 되묻는다. 분노, 애통, 슬픔 등을 승화시키거나 창조적으로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원예라는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흙을 파고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는 일을 '파괴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파괴'는 성장을 북돋는 돌봄의 한 형태로 흙을 일굼으로써 공격성과 불안을 줄여주고 희망과 같은 선한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곧 원예는 본질적으로 식물과 사람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에너지를 쏟아 흙을 일구면, 무언가 대가가 따른다. 거기에 마법이 있고, 성실한 노력도 있다. 무엇보다 땅이 낸 열매와 꽃들은 현실이 된 '좋음'의 형태다. 원예에는 믿음을 줄 가치가, 그것도 우리 손 닿는 곳에 있다. 씨앗을 뿌리면서 우리는 가능성의 서사를 심는다. 그것은 희망의 행위다. 씨앗이 전부 발아하지는 않지만, 땅에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안정감이 느껴진다.(80~81쪽)
<정원의 쓸모>에는 세계 여러 지역의 다양한 원예 프로그램(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사례가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원예가 사람들의 정서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나아가 회복탄력성을 길러준다는 점이다. 내향적 특징을 갖는 식물들과의 교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온과 평가받지 않을 자유를 가져다준다. 특히 뉴욕 라이커스섬에 자리한 교도소에서는 '그린하우스 프로그램'이 수감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공감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새와 곤충은 자유로이 교도소 한 편의 정원을 오가지만, 뿌리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수감자들과 똑같이 갇혀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 일종의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동물과 사람의 취약성은 폭력의 희생자에게 잔인하고 가학적인 충동을 촉발할 수 있지만, 식물에는 고통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잔혹성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식물을 통해서는 안전하게 돌봄과 애정을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젊은이 프랜시스의 경우는 앞서 수감자들과 또 다른 결의 공감을 식물들로부터 받았다고 밝힌다. "식물들은 연약하면서도 긍정적인 것 같고, 사계절을 버텨요. 여기 남아서 잘 살고 있잖아요."라고 말한 그는 '연약한 식물들'을 돌보면서 자신과 식물을 동일시함으로써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식물들이 그에게 존재의 다른 방식을 보여줬던 것이다.
워즈워스를 사랑하고 프로이트를 연구한 저자는 문학, 역사, 철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길어올린다.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정원의 숨겨진 의미에서부터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정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까지, 그의 폭넓은 이해와 통찰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에디가 스라이브 정원에서 처음 경험한 유대가 청결하고 상쾌한 나무 냄새라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음에 독성 감정이 가득하면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냄새는 그런 장벽을 뚫고 들어온다. 후각은 가장 강력하고 원시적인 감각이다. 코는 편도체, 두뇌 깊이 자리한 정서와 기억 중추들과 직접 소통한다. 뇌의 이 부분들은 후각계와 함께 진화했고, 그래서 정서와 기억과 냄새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101쪽)
정원은 근본적으로 공포가 없는 안전한 공간이기도 하다. '감싸주고 개방하는' 환경의 결합은 강력한 안전감과 평온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회복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속도에 맞추어 성장하는 정원의 식물들처럼 심각한 트라우마도 필연적으로 느리게 회복되기 마련이다. 스라이브 정원에서 2년 가까이 원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에디는 전직 군인으로 후각적 트라우마를 나무를 돌보고 유대하면서 서서히 극복해나갔다. 이러한 에디의 경험은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가 2차 대전 후 트라우마를 겪은 퇴역 군인들과 함께 하면서 관찰한 내용과 일치하는데, 그는 항상 원예 치료를 정신과 치료의 중요한 보조 수단으로 권장했다고 한다.
원예로 만들 수 있는 정원의 종류는 엄청나게 많다. 그중에는 집에서 먹을 채소를 키우는 정원, 그러니까 텃밭이 있다. 열매, 꽃, 푸성귀를 채집하러 텃밭에 갈 때면 마음속에 기대감이 일어, 구석기시대 우리 조상이 동굴을 나설 때처럼 도파민이 방출되는 기분이다.(127쪽)
모든 텃밭에는 야생의 요소가 끊임없이 침입하기에 수확보다는 채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저자는 원예의 기원을 수렵과 채집으로부터 농경 사회로 접어들어 경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당시 소규모 경작은 식량의 부족보다는 식량의 풍요에서 시작된 것으로 물과 비옥한 토양, 온화한 기후와 풍성한 자연 자원을 제공하는 호숫가, 늪가, 강가의 정착지들에서 식물들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시간과 기회가 주었다는 설명이다. 경작은 거친 땅을 인간화하고 환경의 가치를 높이는 일로서 문화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culture(문화)'라는 낱말이 흙을 일구고 식물을 기르고 돌보는 일을 의미하는 'cultivate(경작, 재배)'에서 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잭과 콩나물 이야기'도 채소가 힘을 주는 내용이다. 이 영국 동화는 5000년 전 신화에서 기원한다. 잭은 가난한 어머니의 마지막 돈으로 '마법 씨앗'을 산다.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 씨앗은 커더란 콩줄기로 자란다. 잭은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못된 거인을 만나고, 거인이 자기 가족에게서 훔쳐간 것을 모두 되찾는다.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이 자신의 효능을 깨달으면서 남자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사회정의를 이루는 우화이다.(202~203쪽)
18세기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 즉 도시로 이주한 철기 노동자와 방직 노동자들이 치유와 회복을 위해 공장의 한 편에다가 꽃을 심고 키웠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당시 그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21세기 폭력과 약물중독이 만연한 도시 빈곤 지역에서는 젊은이들이 식물맹에서 벗어나 안전한 녹색 공간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시 농장 청소년 프로젝트가 현재 진행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근·현대사회의 위기는 곧 소속감의 위기라고 진단한 저자는 '공동체 원예'를 통해 사람들이 정원이라는 장소와 유대를 맺고 사람들과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양한 '못된 거인들' 즉, 스트레스와 동기 상실 같은 개인적 문제부터 공동체의 파편화, 신선식품 부재, 도시의 쇠퇴 같은 사회 정치적 문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정원의 힘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오늘날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 환경의 위기 또한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른바 ‘기후 슬픔’(또는 '환경 우울증') 현상은 자연의 위기가 닥치면서 정원의 회복적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야생화(rewilding) 운동이 바로 원예가 지배 행위를 넘어 구조와 회복 행위가 되었음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도 알려준다.
몽테뉴는 "양배추를 심다가 죽음을 맞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생각하지 않고, 마무리 짓지 못한 정원을 더 생각하면서."라며 정원에서 죽음을 맞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고 예측불허이지만, 저자는 몽테뉴의 양배추밭이 비단 미완의 인생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연속성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말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우리의 말과 생각은 우리가 심은 현실 또는 비유 속 양배추를 통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노령의 상실을 관리하는 데에 "나쁜 것은 떠나보내고 좋은 것에 정착하는 상황"이 최고임을 발견한 몽테뉴는 매일 과수원 산책을 했고 부정적인 생각에 맞닥뜨리면 의식적으로 관심을 주변 환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계절로 비유할 수 있다. 몽테뉴가 언급한 자연스러운 죽음과 달리 타의에 의한, 이를테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터에서도 그 계절감을 느낄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놀랍게도 저자는 근현대 전쟁사 기록에서 식물과 꽃이 참전자들이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참호 속 꽃 한송이에서 해마다 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죽지 않고 좋은 것이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으며 공포와 절망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원이 주는 가장 영속적인 위안'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런 삶과 죽음의 병치에는 피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치명적인 포탄 공격 사이에 피어 있는 백합의 아름다움, 어쩌면 바깥에서 볼 때에만 당혹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참호의 군인들은 어머니와 정원에 대해 꿈을 꾸었다고 하니 말이다. 안전한 집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꿈들이다. 꽃들은 전쟁의 광기와 공포 속에서 친숙함과 이성의 끈이 되고, 극단적인 트라우마와 소외 속에서 심리적 생명줄 역할을 한다.(211쪽)
어느새 정원을 찾아나섰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정원 앞에 서게 된다. 저자는 손을 흔들며 "원예는 오래된 것인 동시에 현대적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원예는 아주 오래 전 채집과 농경 사이에서 자라났지만, 기본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일이자 원예가는 언제나 더 좋은 미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거의 정원을 새롭게, 또 미래의 정원을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만들어준 이 책이 한 줌의 흙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태껏 정원을 가져본 적이 없다. 무소유 혹은 비움의 미덕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며 자신만의 정원 하나쯤은 욕심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어쩌면 작은 화분 하나를 집 안에 들여 놓는 일부터가 식물을 돌보고, 나 그리고 우리를 돌보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혹시 이것마저도 망설여지는 사람이 있다면, 왜 우리가 정원에 발을 내딛고 손을 들어 흙과 식물을 만져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책, <정원의 쓸모>를 먼저 펼쳐보길 권한다. 흙 속에 저 정원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말은, 인생에는 돌봄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인생, 우리 공동체, 우리가 기거하는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볼테르 이야기(소설 『캉디드』)의 교훈은 이상화한 인생을 추구하면서 문제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현실적인 상황에 전념하라는 뜻이다.(314~315쪽)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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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