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책 리뷰

kkoddang
- 작성일
- 2021.4.10
잃어버린 사랑
- 글쓴이
- 엘레나 페란테 저
한길사
"여자는 수천 가지 일을 해낸다.
힘겹게 일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러다 지쳐 쓰러진다.
그러는 동안 가슴은 커지고 질은 부풀어 오른다.
몸 안에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생명체 때문에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 생명체는 나의 것이고 나의 인생이지만 끊임없이 내 몸에서 뛰쳐나가려 한다.
내 뱃속에 살지만 정작 내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묵직하고 유쾌한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지만 때로는 그 생명체가 혈관 속에 주입된 벌레의 독처럼 혐오스럽기도 하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59 / 한길사
모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인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감정일까.
이 논쟁은 이제 후자 쪽으로 많이 기운 것 같다.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모성을 하나의 폭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모성이 없는 여성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사회면을 장식하는 비정한 엄마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는 모성의 신화에 기대 가치 판단을 내린다. 아이를 학대하는 행위는 모성을 떠나 약한 개체를 대하는 어른으로서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방임의 경우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은 지적하지 않는다. 아이를 지극한 정성과 마음으로 돌보는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마지막인 <잃어버린 사랑>은 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성애보다 자신의 삶을 더 사랑했던 레다의 삶을 작가는 '나쁜 사랑'으로 보고 있는걸까?
레다는 올해 마흔 여덞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딸을 낳은 그녀는 성년이 된 딸 비앙카와 마르타를 전 남편 잔니가 있는 캐나다로 보내고 삶이 보다 윤택해진 느낌과 함께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휴가를 이오니아 해안에서 보내기로 한다.
휴가지에서 레다는 나폴리에서 온 대가족을 본다. 레다는 모래사장에서 딸 엘레나와 사랑스럽게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젊은 엄마 니나에게 불쾌감을 느낀다. 엘레나와 함께 인형을 가지고 항상 사랑을 듬뿍 주는 엄마와 사랑 받는 아이에 대한 역할 놀이를 하고 있는 모녀가 그토록 꼴보기 싫었던 걸까. 레다는 남편과 언쟁하느라 니나가 엘레나를 방치하고, 엘레나가 혼자만의 놀이에 빠지느라 인형을 버려둔 사이 인형을 훔쳐 간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는 감당하기 버거운 아이로 돌변한다. 시종일관 떼를 쓰며 엄마 니나를 힘들게 만든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니나는 힘겹게 모성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를 볼 때 예전처럼 사랑스러운 눈길이 아닌 짜증과 피로감이 섞인 표정이 된다거나, 아이를 다른 가족들에게 맡기고 비치하우스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 지노와 밀회를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니나의 모습에서 레다는 점점 묘한 유대감을 느낀다. 레다 역시 '비뚤어진 엄마'였기 때문이다.
레다는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에 남편과 아이들을 떠난 적이 있다. 학자로써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자신의 일을 인정해주는 권위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 전부터 레다는 자신의 삶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며 불행을 느껴왔다. 자신의 삶과 모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였던 엄마 레다. 여성과 엄마 사이에서 헤매며 딸의 젊은 남자친구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레다의 혼란한 정체성.
"비앙카와 마르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를 길들이려는 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내게는 딸들의 염원보다 딸들이 없는 바깥세상에서 비춰드는 삶의 광채가 더 밝게 느껴졌다.
새로운 색상, 새로운 육체, 새로운 지식, 드디어 나만의 진정한 언어로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언어의 광채가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187 / 한길사
그러는 사이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모든 책임을 레다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무너진 균형, 한쪽에만 몰린 희생.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 가족을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여행을 즐기고 있는 영국인 브랜디란 여자의 존재는 레다의 내면에 억눌렀던 욕망을 폭발시킨다.
아이들을 떠나 레다는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3년 후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서, 레다는 니나에게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내 자신이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더 절망적이었다'고 했던 말은 진심일까?
아무튼 레다는 돌아왔고, 남편 잔니는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이 가족을 떠나 캐나다로 가버린다. 그 후 레다는 다시 아이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엄마'의 삶에 갇혀버린다. 엘레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인형처럼.
마치 니나에게 강요된 모성을 제거해준듯 인형을 훔친 뒤 엘레나에게는 엄마의 공백이 생기고, 이를 니나의 시누이이자 임산부인 로사리아가 채운다. 그리고 레다는 그녀에게 시종일관 혐오를 느낀다.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레다에겐 아직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지 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선인 것이다.
"깨닫지 못했을 뿐 그때 나는 이미 불행했다.
어린 비앙카는 아름다운 출산의 경험 뒤에 갑자기 변해버렸다.
비앙카는 나를 배신하고 내 모든 힘과 기운과 상상력을 앗아가 버렸다.
남편은 자기 일에 너무 바빠서 자기 딸이 내 뱃속에 있을 때와는 달리 게걸스럽고, 까다로운 데다 성격이 밥맛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번째 임신을 첫 임신 때처럼 기쁘게 감내할 만한 힘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이성이 육체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226 / 한길사
레다 역시 첫 아이 비앙카를 임신했을 때만해도 모든 상황이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자라주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신은 '욕망이 거세된 죽은 몸뚱이'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두 번째 임신은 강장동물이 자신의 몸을 점령하는 듯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어쩌면 이것도 굉장히 폭력적일 것이다)에서 레다는 너무나 불편한 존재이다. 아이들을 증오하는 엄마의 마음을 보기가 버겁다. 하지만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런 불편한 상황을 내내 마주하게 하며 당연하다 느꼈던 감정을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가끔은 너무 비호감이라 인물에 완전하게 이입되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이 삶을 이해하게 된다.
이번 소설도 불편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성이란 이름의 폭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
마지막에 딸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레다의 답변은 오랫동안 짊어져왔던 모성에서 스스로 해방된 느낌이다. 나쁜 사랑 3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자아 찾기'가 이번에도 흥미롭게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질문에 빠져들게 만드는 이 불편한 소설의 힘에 대하여.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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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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