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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yoh
- 작성일
- 2021.4.13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글쓴이
- 이덕일 저
다산초당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이 책은?
이 책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는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인 윤휴의 사상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왔다.
그는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거부하며 주류 학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이 외면하거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많은 저술을 통해 그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윤휴, 조선 시대의 유학자로, 1617 ~ 1680 의 시대를 살았다.
그가 살았던 조선 시대,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인조반정 1623년
이괄의 난 1624년
정묘호란 1627년
병자호란 1636년
그러니, 조선시대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다 겪은 셈이다.
그래서 윤휴의 생애는 특별히 의미가 있다.
윤휴가 그런 사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윤휴는 그런 사건을 거치면서 북벌을 주창한 효종(재위 1649∼1659)과 현종(재위 1659∼1674) 시대를 거쳐 숙종 시대(재위: 1674∼1720)에 들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약을 받고.
왜 그는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을까, 그 이유를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죄목은?
윤휴가 죽어야 했던 실제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제로 북벌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반 사대부들도 평민들처럼 똑같은 의무를 지는 대개혁을 실시하려던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서인 정권 시대의 금기였다.
북벌은 말로만 추진해야 하고 자신들은 영원히 계급적 특권을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평민들은 사대부를 위해 존재하는 노예계급이어야 했다.
이 지형을 바꾸려던 윤휴는 사라져야 했다. (394쪽)
특이한 사항은 그가 다른 죄로 사약을 받은 게 아니라, 사문난적이란 죄명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다.
송시열과 윤휴
윤휴가 사문난적이라는 엄청난 죄목으로 죽어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송시열과의 갈등이었다. 송시열은 애초에는 윤휴와 잘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 반대편에 서게 되고 결국 윤휴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송시열이 46세 때인 효종 4년에 종질 송기후의 집에 갔다가 윤휴가 지은 『중용신주(中庸新註)』가 있자, 땅에 던지면서 크게 책망했다고 한다.
“윤휴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했으며, 너는 또 어찌 감히 이런 책을 가지고 있느냐?”(76쪽)
송시열은 주희를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말이나 글은 일점일획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주자 절대 추종론자’였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그래서 효종 4년에 송시열은 직접 공격하고 나섰다. (77쪽)
이에 대한 윤선거의 발언이 의미있다.
“의리는 천하의 공물인데 지금 희중(希仲)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은 무슨 일인가. 주자 이후에는 말을 할 수 없다면, 북계(北溪)와 신안(新安)은 왜 말을 했고 그 말이 경전에도 나와 있는가?”(79쪽)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북계는 송나라 학자이자 주자의 제자인 진순(陳淳)이고
신안은 원나라 학자 진역(陳?)을 말한다.
『중용』에 대하여
윤휴와 직접 관련이 되는 경전이 바로 『중용』이다.
다른 학자들이 『중용』에 대하여 주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데 반하여 윤휴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른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윤휴는 『중용』에 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졌는지, 알아보자,
송시열이 윤휴에 대하여 비판한 사항이기도 하니, 잘 살펴보자.
중용이 예기의 한편으로 실려 있었을 때는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다.
주희는 이를 33장으로 나누고 장의 끝에 장하주(章下註)라는 이름으로 해석을 붙이고 다시 130개의 절로 나누었다.
그러면 윤휴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윤휴는 이런 주희의 장절 구분을 따르지 않고 10장 28절로 나누었다.
윤휴는 『중용 독서기』에서 중용을 「천명(天命)」, 「중용(中庸)」, 「비은(費隱)」, 「행원(行遠)」, 「문왕(文王)」, 「박학(博學)」, 「자성(自成)」, 「성인(聖人)」, 「중니(仲尼)」, 「상경(尙絅)」의 10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이상 『중용장구』 차례를 이와 같이 교정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윤휴가 『중용 독서기』에서 주자의 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희와 다른 장절 구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것이다. (76-77쪽)
결국은 사사(賜死) -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5월 20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윤휴가 머무는 서대문 밖 여염집에 사약이 내려졌다.
학문과 북벌대의와 백성들의 민폐 제거에 바친 인생이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야사에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390쪽)
수레 제작에 관하여
윤휴는 수레 제작을 주창했지만, 이것 또한 큰 반대에 부딪히고 좌절되었을 뿐이다.
윤휴는 북벌의 주요 준비 사업중의 하나로 전차 제작을 강하게 주장했다.
윤휴는 기병 중심의 청나라 군사를 보병 중심의 조선군이 꺾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청나라 기병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차라고 본 것이다.
윤휴는 전차를 농경에도 이용하고 수송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구라고 보았다. (246쪽)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반대의견이 많아 수레 제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수레 제작은 그후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파에 의해 다시 제기되지만,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산업을 위해 생각해볼만도 한 것이, 그저 당리당략에, 탁상공론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이 책은?
윤휴, 그 이름은 그의 죽음 이후 금기가 되었다.
경전 해석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다는 죄 때문에, 그의 생각이 단죄를 당한 것이다.
이 책으로 그런 시대를 살았던 윤휴라는 선비를 만나고, 그의 사상을 돌아보게 된다. 주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경전 해석, 그야말로 ‘주자의 시대’에 경전 해석을 다르게 했다고 죽어야 했던 그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그의 죽음 이후로 기울어지는 조선이란 나라가, 그래서 안타깝다.
그의 생각이 좀더 인정받았더라면, 그래서 활발하게 생각들이 교환되고, 열린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해석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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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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