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

아그네스
- 작성일
- 2021.4.27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글쓴이
- 정희진 저
교양인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내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 강의를 주로 듣는 두 아이가 학교가 아니라 집에 주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틈틈이 이어온 독서가 유일한 위로이자 해방구다. 특히 페미니즘 책읽기는 전 지구적 혼란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힘이 되고 있다.
몇 년 전 페미니즘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그전까지는 몰랐던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와 성차별과 불평등을 깨닫고 분노하고 흥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나와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 속에서도 내 위치에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바꾸려고 실천하고 있다. 그 첫 실천이 가정에서 내 목소리를 서서히 높이기다. 내향적인 데다 수동적으로 살아온 탓에 시끄러움을 싫어하던 예전의 나는 참는 미덕(?)을 발휘하며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참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우리 가정의 불평등을 심각하게 깨닫고 가정에서 내 목소리를 높이는 쪽으로 바꾸면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아이들의 발언권을 키워주면서 가장인 남편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아지게 되었고, 우리 가정은 좀 더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바뀌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는 걸 실감한다. 내게 페미니즘 책읽기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험한 세상을 나답게 살아가게 하는 무기다.
수 년 전 저자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페미니즘 세계관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후로 만난 <정희진처럼 읽기>와 <아주 친밀한 폭력>, <혼자서 본 영화> 등으로 우리 사회와 나 자신에 대한 앎과 깨달음으로 나를 이끌고 있으니 저자는 내게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앞서 출간된 두 권의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나를 알기위해서 쓴다>에 이은 세 번째 독후감이자 서평이다. 앞서 <정희진처럼 읽기>를 통해 페미니즘적 사유를 통과한 신선하고 통찰력 있는 독후감의 세계를 제시한 저자는 이번에 인연이 닿은 27권의 책을 통해 여성주의 세계관으로 파악한 남성중심 사회와 역사, 권력과 인간관계, 약자의 고통, 진화생물학의 문제, 위안부 문제의 본질 등 전방위적인 치열한 사유와 독서,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실 저자의 인식을 따라갈 만큼 페미니즘 공부와 깊이가 부족한 나로서는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놀란다.
재미 여성주의 역사학자 여지연 교수의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군인 아내들의 이야기>에 대한 서평, '여성도 한국인도 아닌'이란 제목의 글을 읽다가 문득 국민학교 시절 헤어진 단짝 친구가 떠올랐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친구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엄마와 함께 아빠의 나라로 간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의 외모는 우리 사회가 말하는 '혼혈아'인데 당시에는 딱히 의식하지 못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에다 우리 말을 잘했고 갈색 눈과 갈색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녀의 오똑한 서구적 외모가 그다지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에 의하면 "1970,1980년대에도 해마다 약 4천 명의 한국 여성이 군인 아내로서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친구의 아버지도 미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6·25 이후 해마다 수천 명의 한국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해 떠났다는 사실이 놀라운데다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역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비가시화된 것은 명백한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우파 세력 일부에서는 일제시대 위안부가 알선업자를 통한 자발적 성매매였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한국 여성 성착취를 합리화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강제성 담론은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맥거핀'이"라 비판한다.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인 현재도 한국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고, 여성은 언제까지 성적 대상화가 되어야 하는지 '리얼 돌'까지 수입한 우리 사회의 수준이 실망스럽다. 이에 대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의 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우침을 주는 부분을 만났다. '군 위안부 운동의 '희비극''이란 글에서다.
이처럼 알선업자, 대리상이 취급하는 대상은 상품이나 인간의 노동력(용역)이지, 인간 자체가 아니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폭력의 한 형태냐는 논쟁에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성매매에서 거래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 여성의 몸 그 자체다. 강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갔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군 '위안부'에 대한 다양한 이론(異論)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매매, 성폭력 제도의 본질적 공통점은 남성의 성은 남성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에서 분리된다는 점이다. 남성의 성은 개인의 몸에 소속되어 있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 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남성 간 정치의 매개물이 되거나 강자들의 싸움터(battle ground)로 제공된다. 우리가 성 상품화, 여성의 대상화라고 부르는 현실이 이것이다. 내가 스스로 팔든 남에게 팔리든, 성매매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object)이 됨을 의미한다. (170쪽)
얼마 전 우리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그간 변희수 하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변 하사가 입학을 희망한 여대의 페미니즘 동아리 회원들이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반대한 행동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언제나 성역할과 시민권 사이에서 갈등했고, <여성성의 신화>는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신자유주의는 인류 최초로 가부장제를 이긴 체제다. 신자유주의는 페미니즘을 일정 정도 허용했다. 남성의 성역할과 시민권, 노동권은 대립하지 않지만 여성이 성역할 담당자 대신 개인이 되려면 언제나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여성에게도 개인화, 시민권을 허용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여성 운동의 '대중화'이다. 현재 한국 여성 운동의 일부가 유례없이 동성애, 트랜스젠더, 난민 혐오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당대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와 연대로서 페미니즘이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118-119쪽)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여성주의 관점과 인문학적으로 깨달은 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부분은 약자의 '말하기'다. 이 부분은 아직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약자에게 억울한 경험은 있는데 그 경험을 표현할 자신의 언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강자 중심의 현실을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하다.
다시 요약하면 사회가 고통을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말하기인데,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언어가 없는 사람에게는 국가보안법 같은 법적 검열이나 사회문화적 검열이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강력한 방벽이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경험은 강자의 시각에서 해석된다. 그리고 각성하기 전의 약자는 강자의 시각에서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자신의 경험, 노동, 고통, 시간을 지배자가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른 삶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삶은 이전과는 다르다. (91쪽)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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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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