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카테고리

grg99
- 작성일
- 2021.7.7
다크 챕터
- 글쓴이
- 위니 리 저
한길사
<다크 챕터>는 성폭행 피해 생존자인 작가 위니 리의 자전적 소설로, 아시안계 미국여성인 그가 아일랜드에서 겪은 성폭력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북아일랜드의 중요한 정부 행사에 참석차 방문한 비비안은 홀로 떠난 바이킹을 떠난다. 그는 18살 때부터 여행 가이드북 아르바이트를 할만큼 여행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단 30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그는 <앞으로는 예전과 똑같은 내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수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 왜 그런 외진 곳에 혼자 갔니?
- 왜 필사적으로 도망치지 않았니?
- 왜 더 크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니?
이러한 질문들은 비슷한 강간 사건 보도에 집안 어른이 볼멘소리로 던졌을 한마디, 늦은 시각 돌아다닐 때 들었던 잔소리들에서 비롯되어 여성의 뇌속에 깊숙이 박힌 것들이다.
그는 단지 성폭행 피해 경험만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앞서 번잡한 기호(+)를 통해 묘사했듯,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잡다한 수식어로 표현되는 타자이다. 여성인데, 게다가 아시안인데, 게다가 하버드까지 나온 사람인 것이다. 비비안은 이와 같은 단어들을 재구성해 언론이 그를 재현하는 방식과, “정의를 구하는 모든 발걸음마다 그녀는 한 겹 또 한 겹 벗겨진다.”(469p) 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듯 피해자의 권리 보호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법제도, 어떤 타인도 이 고통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외로움에 또다시 상처받는다.
“어딘가의 평행우주에서는 그녀는 강간당한 적이 없다. 그녀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
평행우주들이 셀 수 없는 가능성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들로 쪼개지는 가운데 그녀는 잠을 잔다.”
수많은 If를 떠올리며 또다른 결과값을 예측하던 비비안은, 결국 평행우주 너머의 자신에게 희망을 건다. 그쪽의 너는 안전하게, 예전과 같이 일을 하고 사랑을 하며 살고 있겠지. 그러나 이 우주의 비비안은 틀림없는 강간 피해자다. 부정할 수 없고, 오직 그만이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해자를 제외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비안은 주변의 지인과 가족 일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기에 절망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많은 법적 절차에 동행했다. 먹을 것을 사다주었고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주었다. 그 속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은, 생각보다 많은 여자친구들이 비슷한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 순간을 철저히 외면하거나 숨긴 채 살아온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소설이 묘사하는 비비안의 감정 중 눈에 띄는 점은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분노’, ‘비어버린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훨씬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응당 느껴야 할 수치심이란 없다.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이후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수치심, 즉 부끄러움도 어딘가 존재할 수 있겠으나 차라리 분노와 무력감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적 수치심’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고, 검찰은 이를 ‘불쾌감’으로 변경하고 있다.
소설은 피해자인 비비안과 가해자인 조니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용한다. 조니의 서술에서는 잘못된 성의식과 여성혐오, 자기합리화 기제 등이 돋보이는데, <성적 수치심>은 마치 그런 조니의 시점에서나 자연스럽다.
소설은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회복되어가는 비비안을 그린다. 물론, 마법같은 변화는 없다. “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와 사랑으로 강간 피해를 극복하고, 이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답니다!” ...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고통스럽고 지난한 수사 과정과 무력한 사법제도를 별다른 수 없이 견디고, PTSD, 불안장애, 불면을 안고, 더는 일 할 수 없어 퇴사하여 해지한 적금으로 사는, 그런 인생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고, 복구 불가능해보였던 피해 이후의 삶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과정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 까지도 비비안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다만 새로운 만남을 덜 두려워하기 위해 훈련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위해 이력서를 쓴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성범죄는 분명 피해자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다. 인권과 존엄을 극도로 훼손하는 행위니 당연하다. 하지만 사건 외부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둥, “이제 쟤(피해자)는 어떻게 사니”라는 둥, 안타까움을 빙자해 내뱉는 독선 또한 2차 가해와 다름없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면 피해자의 삶은 이어질 것이고, 사건 전과 똑같은 일상을 살 수 없다 하더라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가능성을 깎아내릴 수 없다.
비비안이 강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현명하고, 올바른 대처를 하는 법을 안다. 모든 피해자가 그처럼 행동하고 이겨낼 순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믿을만한 보호자가 부재하여 더욱 절망스러운 피해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하고 당당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와야 한다. 작가가 세페이지를 할애해 작성한 “감사의 말” 파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그가 연대와 지지 속에서 ‘다크 챕터’를 넘기고 ‘또 다른 챕터’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암시한다.
위니 리는 떠올리기조차 힘들었던 사건을 글로 풀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비슷한 피해자와 생존자들에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그 외로움을 공유할 누군가가, 당신을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끝끝내 <다크 챕터>를 완성한 것이다.
그의 상상처럼 어떤 우주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그런 확률에 기대기에 어떤 곳에서든 비슷하게 고통받는 여성이 너무 많다. <다크 챕터>는 더 많은 사람이 피해자의 삶에 공감할 수 있기를, 또 피해 이후 삶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함께 지지하고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책이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