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文學

waterelf
- 작성일
- 2021.10.20
재능의 불시착
- 글쓴이
- 박소연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과거에는 한 직장에서 정년(停年)까지 맞이하는 일이 많아, ‘평생직장’이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1987년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2021년 잡코리아에서 직장인 48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 하반기 이직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준비 중이라는 45.8%를 포함해서 90.3%가 지금 직장이 평생 직장이 아니라는 의미의 대답을1) 한 것은 이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직장인은 현재 직장에서의 퇴직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다.
1987년 이후 ‘취업난’이라는 말처럼 직장을 구해 입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퇴사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 많은 연봉을 위해 혹은 적성에 맞지 않아 이직(移職)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에 치여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퇴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퇴사를 하려면, 충분한 인수인계와 정리를 위해 30일 전에 회사에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제로 이를 지키는 경우가 드물다. 심지어 점심 시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사직 의사를 전화로 통보하거나 출장 가서 현지에서 퇴사하겠다고 연락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박소연의 “막내가 사라졌다”라는 단편에서 막내 강시준이 퇴사를 문자로 통보하는 것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퇴사하느냐 보다 어떤 식으로 그 사람이 퇴사한 후유증을 처리하느냐가 문제다. 다들 알다시피 누군가 퇴사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인원이 충원되기 전까지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갑작스럽게 퇴사할 경우 인수인계가 되지 않아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시기를 보내야 한다. 그러니 강시준의 퇴사로 민 대리, 최 과장, 석 팀장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 짐작이 간다. 심지어 사직서가 없어 뭐라고 퇴사 사유를 적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
게다가 요즘처럼 SNS가 활발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는 퇴사자가 이를 폭로해서 자신이 희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퇴사 처리가 끝날 때까지 전전긍긍(戰戰兢兢)할 수 밖에…….
“내일까지 두려움에 떨 사람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예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p. 20]
물론 문맥상 최초의 여성 임원이자 화끈한 여장부 스타일의 본부장이 두 달 전 ‘리버스 멘토링의 밤’에 멘티인 신입사원 강시준의 몸을 더듬으며 안겨준 성적 수치심이 그의 퇴사에 한 몫 했음은 명확하다.
본부장은 “그날 술에 잔뜩 취해서는 시준 씨를 옆에 끼고 어깨동무하고, 귀엽다고 볼을 꼬집고 난리가 났대. 나중에는 만취해서 볼에 뽀뽀도 했다는 거야. 심지어는 시준 씨 허벅지를 칭찬하면서 점점 안쪽으로 손이 들어가려는 걸 주위에서 간신히 말려서 떼놨다 더라. 그런데 그 일 직후에 시준 씨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는 거야. 전화해도 안 받고” [p. 14]
여기에 석 팀장이 강시준에게 자신이 다니는 서강대 경제대학원 야간 과정 과제에 대한 도움뿐 아니라 석 팀장 지도교수의 베트남 골프 여행 관련 잡무를 요구했던 것도 그의 퇴사에 한 몫 했으리라 짐작한다. 강시준의 첫 사직서가 그 때 제출되었으니까. 당연히 그의 사직 의사는 반항으로 취급되었고.
이처럼 강시준의 퇴사로 드러난 본부장의 성희롱이나 석 팀장의 개인적인 업무 지시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갑질’이다. 그리고 이런 ‘갑질’은 대체로 공론화(公論化)되지 못하고 쉬쉬하며 묻혀버린다.
그렇기에 퇴사대행업체를 통해 건조하게 퇴사 절차를 진행하고,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까지 침묵하라는 회사의 요청을 거절하는 부분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갑질’에 대한 반격처럼 느껴져서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신듯한 기분이 든다.
‘퇴직대행 서비스’라고 하면 아직까지 낯설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구인난이 심화되어 기업들이 직원들의 퇴사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현실화되었다고 한다. 2018년 기사에 의하면, 5만 엔의 수수료를 받고 퇴직을 대행하는 도쿄[東京]의 엑시트(EXIT)같은 회사가 성업(盛業)중이라고 한다.2)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퇴직대행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강시준이 기묘한 퇴사 절차를 밟는다고 느끼지만, 머지않아 대리인에 의한 퇴사가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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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기, “직장인 90% ‘기회되면 이직’… 평생직장은 구시대 유물”, <노컷뉴스>, 21.07.20 (https://www.nocutnews.co.kr/news/5591616)
2) 방성훈, “‘구인난’에 퇴직 거부하는 日기업… 퇴직대행 사업도 성행”, <이데일리> 18.09.24 (https://n.news.naver.com/mnews/ranking/article/018/0004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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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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