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아무튼, 서평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1.10.30
아무튼, 하루키
- 글쓴이
- 이지수 저
제철소
하루키스트라면
<아무튼, 하루키>를 읽고
아무튼 시리즈 세계관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실존 인물을 다룬 책은 현재까지 두 권이 나왔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장국영 순으로 출간되었다. '하루키스럽다', '하루키스트', '하루키 월드' 등과 같은 신조어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열성 팬들이 모여 결과를 기다린다는 소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는 현대 문학계에 살아 있는 레전드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하루키>는 그의 원서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전공하고 그의 책을 의뢰받는 날까지 번역을 계속하겠다고 말할 만큼 그를 좋아하는 저자가 쓴 '하루키스트의, 하루키스트에 의한, 하루키스트를 위한' 책이다.
책장을 넘기기 전, 책표지에 그려진 '곰'과 '맥주' 그리고 '이지수'라는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최근 읽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옮긴이로서 역자의 말에서 만났던 터라 구면이었던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했던 곰이 하루키가 즐겨 마신다는 맥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이의 이름이 '김참새'라니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타나베: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미도리: 아주 멋져.
와타나베: 그만큼 네가 좋아.
(331쪽, 『상실의 시대』 中)
"맥주의 좋은 점은 말이야, 전부 오줌으로 변해서 나와버린다는 거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야."
(24쪽,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저자는 책의 원고를 쓸 때면 하루키의 책이 등장하는 자기 인생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뒤져봤다고 말한다. 홀로 타향의 침대 위에서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며 청춘의 일과 사랑을 추억하고, 하루키의 미국 생활이 담긴 에세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 속 한 문장인 "외국어를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부분이 있다"처럼 '낭패(狼狽)투성이'였던 일본 유학생활을 들려준다.
또한 육아로 인한 손목 통증을 견디며 귀중한 시간을 바쳐 읽었던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넘어선 배신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찐팬으로서 다음 작품은 하루키스럽길 바라며 계속 응원하기로 한다. 『1973년의 핀볼』의 문장은 반려묘 '디'와 처음 만나서부터 헤어지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는데, 하루키가 고양이에 관해 쓴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떄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107쪽,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1973년의 핀볼』中)
무엇보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회사와 출판사를 거쳐 마침내 번역하는 사람이 된 마법같은 순간과 번역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루키가 어느 날 야구장에서 타자가 친 2루타를 보고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찾은 송정역 맥도날드 2층에서 저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원문을 한 줄 쓰고 번역하기를 반복하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대체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와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처음부터 독특한 맛을 내려고 노린다면 번역자로서는 이류이며, 번역의 참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가에 있다"는 하루키의 말들에 적극 공감하며 저자는 시대를 견디는 번역을 해나갈 것을 다짐한다.
구달: 난 일문과 학생들이 하루키 팬이라는 걸 숨기는지 밝히는지가 궁금해.
(<아무튼, 양말>을 쓴 그 '구달' 작가다.)
지수: 우리 세대는 다들 좋아했으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했어. 나도 일문과 왜 왔냐고 물어보면 하루키 좋아해서 왔다고 하고. 근데 다자이 오사마는 좀 다른 것 같아. 다들 다자이는 속으로만 좋아하지 겉으로는 떳떳하게 말을 못 하더라고.(웃음) 너무 자기도취에 빠진 것 같고, 풋내 나는 청춘 느낌이 있어서겠지. 하루키는 그런 면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도취 없이 담백하잖아.
(145쪽, 「작가에게 바라는 것」-『양을 쫓는 모험』中)
군복무 시절 선임의 관물대(내무반에서 옷이나 물품, 장비 따위를 정리하여 놓는 장) 한 편에 꽂혀 있던 <상실의 시대>를 보고 난 뒤 호기심이 일어서 휴가 때 찾아 읽었던 것이 나와 하루키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는 흐릿해진 스무살 청춘의 멜랑콜리를 알려준 책이었고, 뒤이어 <해변의 카프카>와 <1Q84>를 끝으로 그의 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고, 이따금 에세이를 집어들어 하루키의 일상을 엿보고 있다. 어쩌면 책속에 저자와 출판계 친구들의 대화처럼 그 말랑말랑함이 예전엔 좋았으나 하루키도 변했고 나도 변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하루키는 하루키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난 게 아니라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루티너로서의 다양한 삶을 계속해서 작품들 속에 변주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여러 세대의 하루키 팬들 안에 잠재된 그에 관한 기억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어쨌든, 하루키>, <여하튼, 하루키>, <좌우간, 하루키>와 같은 책들로 새롭게 태어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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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