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이어령의 발상지(發想志)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1.11.20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글쓴이
- 김지수 외 1명
열림원
내 삶 혹은 죽음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5쪽, 프롤로그 中)
[수업을 시작하며]
지난 이십 년 동안 발상(發想)과 발성(發聲), 즉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거나 글로 써내는 일에 대하여 배우고 또 익히는 중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서부터 <이어령, 80년 생각>까지 이어령 선생님의 책과 언론 인터뷰를 교재로 삼아 (2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부터 나 혼자만의) 비대면 수업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과 함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받아든다. 선생님의 수많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27년간 한 길을 걸어온 김지수 기자가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큘럼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건져올린 선물과도 같은 그의 지혜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펴낸 책이다. 나 또한 기꺼이 마지막(이 결코 아니길 바라는 바람으로) 수업의 청강생이 되기로 한다.
[수업중]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20~21쪽, 「어둠과의 팔씨름」)
밤마다 죽음과 팔씨름을 하는 기분이 어떨지, 또 그가 얼마나 외롭고 지난한 시간을 견뎌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그 어둠 속에서 빛이자, 그 싸움에서 전리품과 같은 깨달음을 마지막 수업을 통해 독자와 나누고자 하는데, 옆자리에 죽음과 함께 한밤을 누웠다 다시 눈을 뜨는 그의 글과 말들이 어쩐지 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늘 그랬듯이 자신만의 수사학(레토릭)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독자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30쪽, 퀴블러 로스의 말)
최초로 죽음학을 강의했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했다. 정작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서게 되자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자기에게 덤벼드는 일'이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의 전철을 밟는 모습을 보였다. 언제부턴가 책이나 영화에서 종종 마주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 이어령 선생님은 여섯 살 때 처음 죽음을 느꼈는데,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그늘까지 다 사라진 정오(가 지나면 다시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기지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그는 어째서 가장 찬란한 한낮에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을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그 순간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꾸나'라고 속삭이지.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55쪽, 「대낮의 눈물, 죽음은 생의 클라이맥스」 中)
글쓰기 영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는 글 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가 계속 쓰는 까닭은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육체는 사라질지언정 그의 말과 생각은 책이라는 그릇에 담겨 죽음과 삶에 대한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우물이 되어주리라.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던 그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 바로 '사람이 어떻게 끝나가는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종교와도 같기에 죽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보지만, 암세포가 그의 모든 지식과 생각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로 작용하여 글이 쉬이 써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게 바로 죽음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작고 아름다운 것들, 세 줄로 된 글을 써나간다.
발톱 깎다가 / 눈물 한 방울 / 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내 작은 잔디밭 / 날아온 참새 한 마리 / 눈물 한 방울
(65~66쪽, 「쓸 수 없을 때 쓰는 글」 中)
평생 글을 쓸 때 '관심, 관찰, 관계' 라는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는 그는,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자신과의 관계가 생긴다고 말한다. 문득 인간극장에서 (나 혼자) 절찬상영중인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나간 장면들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더라면 (나 자신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덜 상처받고 더 즐겁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지만, 이제라도 매 신(scean)을 찍을 때마다 삼관(三關) 정신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한 번밖에 못 만난다······ 그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가슴이 저며오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오늘 이 하루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지. 내 앞에 연필 한 자루도 바삐 걸어가는 행인 한 사람도 새롭게 보이는 거야. 마치 사형수가 보듯 세상을 보는 거지."
(160~161쪽,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中)
그렇다면 젊은 날의 스승은 어떻게 사랑을 했을까? 대학시절 좋아했던 한 여학생이 전차가 갑자기 서는 통에 균형을 잃고 흐트러진 자세를 보였는데, 마치 고양이나 자벌레 같이 느껴져서 연애 감정이 달아났다는 그의 말에 과연 관찰다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선명한 사랑의 두 장면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교차하는 전차와 전차에서 자신과 어느 여학생의 눈동자가 완벽히 일치했다가 비껴가던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전동말을 타는데 상대편에서 움직는 말에 놀라 울먹이는 이름 모를 소녀와의 눈맞춤이다. 그는 타자와 내가 하나 되는 흔치 않은 그 순간을 가르켜 '사랑' 혹은 '상호성'이라 부른다.
당신은 운 좋은 인생을 살았는가? 제자의 이어지는 물음에 스승은 답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운을 타고난 것이며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고.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알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지혜의 출발선으로 여겼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그리스의 운명론은, 너와 내가 우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불교의 연기론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가면 질문을 하는 본능을 따라갔어. 그런데 질문을 받으면, 다들 자기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착각하는 거야. 질문 없는 사회에서 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네. 그런 문화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했네.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
(97쪽,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즐거움」 中)
평화롭기보다 지혜롭기를 바랐던 인간 이어령은 여섯 살때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오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이유로 사회성을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그 자발적 외로움이 억압과 관습의 중력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가벼워지는 힘, 즉 경력으로 변해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원천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죠."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중략)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124~125쪽, 「손잡이가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中)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스승은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이다. 자기와 같은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은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지 되묻는다. 투병중에도 쓸 수 없을 때 쓰는 글 '눈물 한 방울'(늙은이의 세 줄 일기)을 통해 할 말을 전하고 있어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답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빌어 아흔아홉 마리 양처럼 제자리에서 풀을 뜯으며 정해진 대로 살기보다는, 돌아온 탕자 같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게 훨씬 행복한 삶이라고 덧붙인다.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네."
"아······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지금껏 살아보니 핏방울 땀방울은 너무 흔해. 서로 박터지게 싸우지. 피와 땀이 싸우면 피눈물밖에는 안 나와.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야.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가 나오는 거라네."
(210~211쪽, 「눈물은 언제 방울지는가」 中)
올해 초에 읽었던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눈물 한 방울'의 힘이라고 말했던 대목이 떠오른다. 대립과 분열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현실에서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눈물은 곧 관용을 의미한다. 이렇게 진지한 순간에도 스승은 유머를 잊지 않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 글자로 줄이면? 뚝!" 다시 눈물 얘기로 돌아가본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주며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하는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수업을 마치며]
배움에 왕도가 없고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을 모르지 않는다.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게 육아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아이를 통해 내가 깨우치고 성장할 때가 더 많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는 존재라고, 그게 바로 실존이라는 스승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아울러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는 말도 곱씹어본다. 지혜로운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법을 알법도 하나 언젠가 죽고마는 존재이다. 아이러니하다는 건 알겠으나 그 정확한 의미까지는 간파하지 못하니, '아, 이러니' 난 지혜롭지 못한건가 싶기도 하다. 신은 죽지 않고,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른 채 그냥 살지만,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알기에 슬퍼하고 또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수업을 듣는 내내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그의 육성을 듣고 기록한 김지수 기자가 부럽기도 했지만, 내게도 그의 지혜를 나눠주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점점 더 많은 청강생이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죽음을 겪고 글로 쓴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죽어감에 대하여 치열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한 이야기가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 혹은 죽음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도 유의미하리라 생각한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291쪽, 「마지막 선물」 中)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