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파충류
- 작성일
- 2021.11.29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 글쓴이
- 한스 폰 루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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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한스 폰 루크 著
제목부터 이미 내 이목을 끌었다.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라니! 게다가 '진중근'이라는 역자의 이름은 일찌기 '전격전의 전설'을 통해 익히 들은 바 있으니 더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내용이 무척이나 알찼기 때문. 이 책의 저자인 한스 폰 루크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독일군 장교이다. 최종 계급 대령으로서 경력을 마쳤으며, 프로이센 군인 집안 출신인 엘리트이기까지 하다. 여타 독일군 출신 인물의 회고록과 차별화 되는 요소라고 한다면, 저자의 화려한 이력이 바로 그것. 베르사유 체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인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에선 롬멜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독소전쟁 발발 이후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어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했다. 롬멜의 요청으로 그의 아프리카 군단에 배속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후에 다시 서부전선으로 이동 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방어 임무를, 그 후엔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베를린으로 닥쳐오는 소련군에 맞서 싸우다 포로가 된 후 포로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실로 방대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부터 1945년 5월 8일, 독일의 항복까지 6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이리도 저자만큼 여러 전역에서 임무를 수행한 이는 결코 많지 않을텐데, 각 전역의 중요 전투는 모두 체험했다고 과언이 아니니 한스 폰 루크 대령의 이력이 더욱 대단해 보인다. 게다가 군 경력 전부를 야전에서 지휘자-지휘관으로서 수행하기까지.
회고록인지라 자신에 대한 윤색이 결코 없지 않으리란 점은 차치하더라도, 저자 자신이 귀족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품위있고 위트까지 겸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 프랑스 침공 당시 현지 유지들을 찾아가 독일군이 범한 실례를 대신 사죄하고 함께 와인을 나누며 문학 얘기를 한다거나, 북아프리카 전선에선 적인 영국군과 일종의 '페어플레이 협약'을 맺기도 하는 등의 일화가 그런 모습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책 제목이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인데 반해, 루크 대령의 군 경력 속에서 롬멜과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점이다. 아마 저자 스스로는 롬멜 아래에서 근무했던 프랑스 침공 당시와 북아프리카 전역을 자신의 군 경력 최고봉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롬멜에게도 어느 정도 보통 사람, 아니 세속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 만 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항상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훗날 어떤 이들은 롬멜 자신의 성과를 미화 과장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의 전투 방식은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이런 비평은 어찌 보면 대다수 고급 장교들의 시가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저자가 미군에 대해 기록한 내용 일부인데, 상당히 인상적인 내용이라 인용해본다.
대대는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했고, 미군 제34사단 예하 몇몇 병사들을 포로로 획득했다.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도 놀랐다. 미군의 최신예 장비와 물자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모두가 개인별로 '1일 분량의 전투식량'을 소지했는데, 봉투를 개봉해보니 초콜릿, 츄잉껌, 버터와 담배도 들어있었다. 내용물도 생소했지만, 봉투의 겉면에 쓰인 글귀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귀관을 양성하기 위해 조국은 세계 최고의 비용을 들였고 최고 수준의 장비와 무기를 지급했다. 이제는 귀관이 최고 수준의 전사임을 증명할 차례다.'
미군은 세계 최고의 전차와 대전차무기를 보유했으며, 전선의 후방에는 무엇이든 신속히 보충할 수 있는 거대한 보급시설이 구축되어 있었다. 전쟁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 같은 '사막의 여우들'을 상대로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아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들의 동맹인 영국군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미군은 특히 융통성이 탁월했다.
회고록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포로 시절의 경험도 정말이지 인상적. 웃음이 나오는 구석도 있었는데, 탈북자들이 증언하던 북한의 부정부패 실황과 여지 없이 닮아있었기 때문. 항상 술에 취해있으며, 에탄올을 빼돌려 뇌물로 바치면 환자 판정을 내려주던 수용소 담당 의사, 공사 자재를 '수용자들의 간악한 사보타주'로 인해 손망실했다고 보고 후 암시장에 팔아치우는 수용소장등 이른바 썩어빠진 관료들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존재 아니던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로 인해 경공업이 붕괴하여 수용자들이 만든 조악한 과도 따위를 식량과 교환해 가는 굴라크 인근 주민들의 모습은 전후 소련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독소전쟁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에서 흘린 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했지만 그것은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독일인 특유의 책임감과 정확성으로 부여된 일은 반드시 완수했다. 작업 초반부터 정해진 시간 이전에 할당량을 모두 해치우곤 했다. 어느날 한 작업팀이 할당량을 초과했다. 그러자 러시아인들이 달려와 버럭 화를 냈다. "당신들 미친 것 아니오? 한번만 더 할당량을 초과하면 다음 날부터 즉시 할당량을 높일 거요. 그렇게 해도 봉급은 단 한푼도, 1g의 빵도 더 받지 못할 거요. 할당량만 채우란 말이오. 그걸로 충분해요!" 소련에서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이었다.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제목에 혹해서 선택한 책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내 기대를 아득히 능가하는 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기갑부대라는 취향 치트키적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지금껏 읽은 개인의 회고록 중에선 가장 재미나게 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현직 장교와 앞으로 장교를 지망하는 이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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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