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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0771
- 작성일
- 2021.12.27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글쓴이
- 정명원 저
한겨레출판
국민참여재판 도중 피고인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재판부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 채 "점심 먹고 재판을 계속합시다."라고 진행할 것이었다. 사라진 피고인의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도주치상)' 즉 뺑소니였다. 그 날은 하필 재판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배심원 여덟 명에 단체로 방청하러 온 그 지역 로스쿨생들이 방청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덟 명의 배심원을 선정하기 위해 배심원 후보자로 아침 일찍 법정에 소환되었던 사람들까지 치면 족히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재판에 참여했다. 그러나 첨심을 먹고 난 뒤 돌아왔어야 할 피고인 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서 재판장은 변호인과 검사를 불러 협의한 다음, 그날의 재판이 중단됨을 선언했다. 가장 황당한 사람은 이 재판을 위해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인 검사인 '나'였다. 사실 이 재판이 국민참여재판이 된 이유는 오직 피고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 영상이 남아 있어 특별히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사건이었는데도 피고인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하며 굳이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했다. 법관이 아닌 배심원에게 물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없지 않느냐는 설득에도 피고인은 완강했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판을 다 별여놓고 재판 도중에 사라져 버리다니... 수사 기록을 보면 피고인은 경찰과의 약속도 검찰 수사관과의 약속도 한 번에 지킨 적이 없었다. 번번이 나오겠다고 하면서 약속한 시간에 나오지 않았고 그때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수사보고서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런 그가 재판이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났기에 웬일이지 하면서도 마음을 놓았는데 재판을 하는 도중에 사라져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재판을 해왔지만 재판 도중에 사라지는 피고인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불구속 상태인 피고인이 재판 중간에 주어진 점심시간에 국밥 한 그릇을 먹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에잇, 오후 재판은 들어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도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런 것을 방지할 만한 어떠한 강제 방안도 없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법조 3륜은 텅 빈 피고인석을 바라보며 멍한 깨달음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를 내고도 부득부득 우겨 100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을 그의 재판을 위해 모아놓은 다음 그 자리를 이탈해버릴 수 있는 자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앞 뒤 안 가리고 회피할 수 있는 자의 자유! 자유로운 그는 재판을 받다가 도주하였으니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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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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