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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1.6
아주 편안한 죽음
- 글쓴이
-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을유문화사
보부아르에 대해서라면 좀 복잡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심 한나 아렌트랑 보부아르를 내 안에서 경쟁시켜놓고서는 단번에 한나 아렌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제2의 성》이란 엄청난 책을 써낸 것도 보부아르고, 지금도 나는 내가 읽은 그 책으로부터 많은 인용문을 가져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지 않은 한나 아렌트 쪽을 너무나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왜이렇게 좋은걸까. 반면에, 왜 이 위대한 보부아르에 대해서라면 한나 아렌트만큼 좋아하지 않는걸까?
그런데 어젯밤 자기 전에 이 책을 마저 읽으면서 보부아르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 책을 통해 보부아르의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에 대한 생각과 어머니에 대한 생각, 그 어머니를 이름으로 호명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되살려놓은 것까지, 그 사유가 깊어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래도 날 안좋아할 수 있니?"
별 수없이,아 나는 좋아해, 좋아합니다, 다 읽을게요 보부아르 님. 했다. 한나 아렌트 책을 한 권씩 모으자고 생각했지만 보부아르에 대해서는 아직 그 마음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별 다섯을 주고 책장을 덮으면서 다 읽자, 보부아르 다 읽자, 하게된 거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해서 사두고서도 여태 미뤄뒀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벌써 슬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여동생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언니 시간이 지나면 엄마도 돌아가실텐데 그 때 어떡하지, 라고 동생이 물을라 치면, 야, 상상만 해도 벌써 다리가 후달리고 눈물이 나와, 했던 터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려고 사두었으면서도 읽지 말까, 종내는 울어버리지 않을까 했던 거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받게될 감정의 격함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있을까, 했던 것.
이 책속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엄마와 딸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그 삶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뒤에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의 의미는 그부분에 더 있는것 같은데, 사실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암으로 육체적 고통에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수술로 그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더 옳은 일이었을까. 그것이 어머니에게 과연 더 나은 일이었을까. 어머니는 저렇게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돌아가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런 후회를 하며 의사들에게 이 생명 연장이 의미가 있냐 따져물어도 의사들은 이것이 본인들의 할 일이라고 답하는 거다. 이런 고통속에 어머니의 삶을 연장하는 것은 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오늘 하루를 또 벌었다고 즐거워하는, 이토록이나 삶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노라면, 어쩌면 이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아프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아있는 것, 어쩌면 그게 더 나은 것일까. 게다가 엄마를 잃지 않은 나로서의 기쁨도 있다. 고통속에, 그 고통이 주는 두려움속에 살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도 막상 살아있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나에게도 기쁜 것. 이런 일을 대체 어떻게, 누가, 무엇이 옳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엄마가 이 상황에 놓인다면 무엇을 원할까. 만약 이렇게나 통증이 심해서 비명을 질러야 한다면 그러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생명을 연장하지 않는 쪽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라도 더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닌가. 당사자를 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안락사인가 수술로 인한 생명연장인가. 나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내 이야기가 된다. 당사자로서의 나, 이렇게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게 노년의 나라면. 나에게 닥칠 미래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다시 생각하게 되는거다. 나는 무엇을 원할까. 너무 아프니 나를 이대로 죽도록 놓아달라 할까, 죽음으로써 나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길 바랄까, 아니면 삶을 하루라도 더 연장시켜달라고, 나는 이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고 울부짖을까. 어쩌면 나는 그 고통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나는 삶을 더 연장하고 싶다. 할 수 있는 최대로 연장해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다.
가끔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일상이 답답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가끔은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내가 혼자이길 원하기도 한다. 몇 년후에는 따로 사는 것을 계획하고 있지만 지금은 함께 살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오는 좋은점과 나쁜점들을 두루 겪고 있다. 보부아르의 책을 읽고 결국 보부아르 어머님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지금 엄마 옆에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그토록 신앙이 깊었던 보부아르의 어머님이 죽음 앞에서 오히려 종교를 찾지 않은 것은 놀랍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어도 죽음 앞에서 더러 종교인이 된다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여러차례 들은바, 이해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오히려 신앙과 멀어진다니. 거기에 대한 보부아르의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글로 써내는 보부아르가 진짜 자지러지게 좋았다.
나는 신앙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에게 종교는 삶의 버팀목이자 핵심이었다. 엄마의 검은색 서랍에서 찾아낸 문서를 통해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엄마가 기도를 기계적으로 하는 단조로운 행위라고 생각했다면, 낱말 맞추기보다 묵주신공이 더 피곤한 일이라고 느끼진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기도를 회피했던 건 오히려 그녀가 기도를 집중력과 성찰을 요하는 일종의 수련, 즉 영혼을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신에게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저를 치유해 주소서. 하지만 당신이 뜻하신 바라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실해야 하는 기도의 순간에 엄마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권리를 자신에게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엄마는 침묵을 택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인자하시니"라고말하면서.
"이해할 수가 없네요"라며 보티에 씨가 놀랍다는 듯 내게 말했다.
"그렇게 믿음이 깊고 독실하신 어머니께서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시다니요!" p.131-132
나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답했다. 당신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종교는 나나 어머니 모두에게 죽고 나서 거둘 성공에 대한 희망이 될 수 없었다. 천국에서든 지상에서든 영원불멸하길 꿈꾸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p.133-134
다 읽고는 내 생각보다 슬픔이 크진 않았는데 두려움이 크게 찾아왔다. 자기 전에 읽었는데 다 읽고 불을 끄고 눈을 감아서도 두려웠다. 죽음이 나에게 닥칠 미래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두려웠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내 손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려준다. 다 괜찮다, 다 괜찮다, 괜찮아. 평안해질 것이다. 그래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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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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