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책..

져니
- 작성일
- 2022.2.22
녹즙 배달원 강정민
- 글쓴이
- 김현진 저
한겨레출판
p.102
나도 민주의 지금 스타일이 좋다. 투명한 얼굴, 단정한 원피스, 욕을 내뱉을 때도 거친 말투를 쓰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고양이처럼 썅, 하고 가르랑거리는 민주의 이 사랑스러움이 나는 너무 좋다.
...
"으응, 너 또 쥐좆같은 놈 만났구나."
어쩐지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에 나오는 하나코를 연상시키는 민주다.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고 언제나 정확한 무게의 "어서 와."를 말하는 하나코. 언제고 그런 말투를 꼭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민주의 "썅~"도 어떻게 거칠지도 않고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지.. 그런 말투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흠..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사람. 어쩐지.. 책 읽어주는 그런 전자기기를 이용하는 게 빠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ㅎ
p.121
민주와 나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지만 좋게 말해 조촐하고 바로 말해 허름한 이곳과 어쩐지 파장이 맞는다고 할까, 친구가 되자마자 우리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늘 앉는 자리, 늘 주문하는 안주, 늘 마시는 주종의 술이 있는 '16mm'는 너무 빨리 달음질쳐 매일 딴판으로 바뀌어버리는 세상의 속도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를 기다려주는 곳이다. 아무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곳을 일명 아지트라고 하겠지.. 요즘은 소울플레이스라고도 하고.. 나도 이런 곳이 있다. 메뉴가 다양하지 않지만, 내 입맛 역시 다양하지 않아서 늘 앉는 자리, 늘 주문하는 디저트, 늘 주문하는 커피가 일정한 카페 '고이'가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뛸 때의 내 가슴을 가장 잘 진정시켜주고 집중시켜준다. 이런 내 아지트를 함께 하는 민주 같은 친구가 가까이에 없는 게 참으로 아쉬울 따름..
p.333
"응, 버리면 아깝잖아. 모아뒀다 녀석들 주기 시작하니까 이제 이 시간이 되면 밥 먹는 줄 알고 으레 와. ... 다 살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이뻐. 살겠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뻐……."
이후로도 나는 사는 게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했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물론 잘 살겠다고 악에 받친 사람들은 무섭지만 그저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리고 이제 함부로 비둘기가 징그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서울에 살 때 종종 '비둘기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 라는 경고문을 본 적이 있다. 많이 모여 있으면 무섭기도 했고, 보기에 넘 통통해서 닭둘기라 부르며 과연.. 저 아이들은 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했었는데..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내가 참 예의가 없었다. 어떤 의지로 살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저 살겠다고 먹는 그 녀석들은 이쁜 녀석들이였는데... 이쁜 녀석들이다.
30대 초반의 알콜의존증인 강정민 씨는 녹즙을 배달했다. 결혼을 안한 그녀가 녹즙을 배달하니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리 험한 일을 하느냐 안타까워 했다. '험한 일'이라.. 세상에 험한 일이 참 많다. 그런 말, 나도 참 많이 들었으니까.. 보험 텔레마케팅할 때도, 젊은 아가씨가 어쩌다가... 택배를 배달하게 되었을 때도, 아가씨가 어쩌다가... 심지어 지금 하는 카페에서 음료를 만드는 일도, .... 어쩌다가... 듣다 보면 사무실에서 하는 일만이 세상 험하지 않은 일인 것만 같다. 정작 나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 위장도 버리고, 불면증도 생기고, 성격도 버렸는데.. 오히려 택배 배달이나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다시 밝아진 것 같다. 사람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뭔가를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나를 외면적인 것에서부터 밝아지게하면서 내면적인 것으로까지 조금씩 밝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 주인공 정민에서 자꾸 보여서 반가우면서도 불편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괜찮은데 다들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당신들의 그런 말들 때문에 가까스로 생겨난 긍정이 다시 사그라드는 걸 알고는 하는 말인지..칫.
김현진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쓰여 있고, 내용도 재미난 소설이 맞지만, 작가 소개를 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단순히 취재에서 나온 이야기라기엔 뭔가 디테일이 섬세하다 했더니.. 어느 정도는 경험이 바탕이 된 자전 소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가님이 괜히 가깝게 느껴지고 궁금해지고..ㅎ 아무래도 조만간 이 작가님의 또 다른 책을 접하게 될 것 같다.ㅎㅎ
언제고.. 영화로 만들어지면.. 정말~ 재밌는 작품 하나가 나올 것 같다.^ㅎ
- 좋아요
- 6
- 댓글
- 1
- 작성일
- 2023.04.26